2025/07 40

손안의 마트, 어르신도 할 수 있다 – 쿠팡·마켓컬리 모바일 장보기 체험기

요즘 같은 시대엔 굳이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에 가지 않아도 됩니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집에서 원하는 물건을 고르고, 결제까지 마치면 다음 날 집 앞까지 물건이 도착합니다. 젊은 세대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고령층에게는 이 모든 과정이 여전히 낯설고 어렵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외출이 힘들고, 무거운 짐을 들기도 부담스러워지는 만큼, 모바일 장보기를 익히는 것은 단순한 편리함을 넘어서 건강과 안전을 위한 선택이 되기도 합니다.특히 요즘처럼 날씨가 무덥거나 눈비가 오는 날에는 외출 자체가 고된 일이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바일 장보기는 이동 없이 신선한 식재료, 생필품 등을 받을 수 있는 훌륭한 대안이 됩니다. 또한, 최근에는 어르신 맞춤형 UI(User Interface) 또는 ..

고령층을 위한 대중교통 앱 사용법 – 시니어도 쉽게 배우는 버스 시간표와 경로 찾기

한국 사회는 디지털 기술의 빠른 발전과 함께 모든 일상이 스마트폰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버스 노선을 알기 위해 정류장에 부착된 종이 시간표나 안내판을 참고하거나, 방송으로 나오는 노선 정보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방식으로는 정확한 정보 파악이 어렵습니다. 시간마다 달라지는 도착 정보, 노선 변경, 교통 혼잡도 등의 상황은 실시간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대도시에서는 앱을 사용하지 않으면 이동이 매우 불편해질 수 있습니다.이처럼 대중교통 정보 시스템이 스마트폰 앱 중심으로 운영되는 현실에서, 고령층이 디지털 도구를 익히지 못하면 일상적인 외출이나 병원 방문조차도 힘들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상당수 시니어 세대가 이러한 앱 활용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성 독립운동가 권애라, 조국과 여성을 위한 두 개의 투쟁

20세기 초 조선, 나라를 잃은 백성들에게 교육은 곧 생존이자 독립의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태어나 한 인간이 스스로 길을 개척하고, 나아가 수많은 여성에게 지식과 민족의식을 심어준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권애라입니다. 그녀는 개성에서 출생하여 이화학당까지 진학한 여성 교육운동가이자, 독립운동에 헌신한 항일투사였습니다. 권애라는 단순히 개인의 성장으로 끝나지 않고, 그 성장의 밑거름을 민족과 여성 해방을 위한 실천으로 승화시킨 인물입니다. 권애라의 교육은 매우 이른 시기에 시작됐습니다. 7세 때 개성의 두을라여학교에 입학해 중등과까지 졸업했고, 이후에는 서울로 올라가 이화학당에서 고등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조선 여성에게 이화학당 진학은 매우 드문 사례였고, 이는 그녀가 얼마나 진보적이..

폭탄보다 강한 신념, 윤봉길이 훙커우공원에 던진 것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사에 있어 윤봉길이라는 이름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는 단순히 한 명의 독립운동가를 넘어, 조국과 민족을 위한 뜨거운 헌신의 상징이자, 한 청년이 품을 수 있는 가장 숭고한 결단을 보여준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폭탄 의거 하나로 압축되기엔 너무도 크고 깊습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훙커우공원에 섰는지 이해하려면, 먼저 덕산의 한 소년이었던 윤봉길의 성장 과정부터 되짚어보아야 합니다.1918년, 11세의 윤봉길은 충남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합니다. 그러나 이듬해 1919년, 3·1운동의 열기를 접하고 곧장 학교를 자퇴합니다. 그저 어린 소년이 아니라, 민족의 울분에 뜨겁게 반응한 깨어 있는 학생이었던 것입니다. 이후 그는 한문과 유학을 배울 수 있는 ..

항일 여성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꺼내야 할 이름

조선 말기에서 대한민국의 시작까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찬란한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여성’이라는 이유로, 혹은 ‘한 인물’에만 집중되는 역사 서술의 한계로 인해 이름이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인물도 있습니다. 김마리아, 그녀도 그렇습니다. 독립운동사에서 김마리아라는 이름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그녀는 조선 여성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던 시절, 일제의 총칼 앞에서도 끝까지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항일 여성운동의 대모'라 불리는 그녀는 단순한 독립운동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사상가였고, 조직가였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생을 철저히 조국에 바친 실천가였습니다.그녀가 살았던 시대는 일제강점기, 말 그대로 나라가 없던 시기였습니다. 여성이라는 성별은 곧 침묵을..

근대의 시작과 독립의 불꽃, 서재필의 삶과 전남 보성 생가 이야기

서재필(徐載弼, 1866~1951)은 조선의 유교 문신에서 시작하여 대한제국의 개혁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해방 이후의 행정 관료까지 전근대와 근현대를 모두 아우른 격동의 시대를 살아간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1866년 병인양요의 혼란 속에서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의 외가에서 태어났습니다. 본가는 충청남도 논산으로, 이후 대전 유성구 진잠현에 살던 재당숙 서광하의 양자로 입적됩니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두각을 드러낸 서재필은 1882년 별시 문과에 병과 3등으로 급제하며 17세의 나이에 관직에 나섰습니다.젊은 서재필은 조선 후기의 개화사상에 매료되었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파 지도자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시대에 대한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그는 1883년 일본 도야마 육군학교에서 ..

청주 쌀안장터 3·1운동, 일제 헌병주재소를 무너뜨린 민중의 함성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의 ‘쌀안장터’는 단지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이 아니었습니다. 1919년 3월 30일, 이곳은 충북 청주 지역 3·1운동의 정점을 찍는 항거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쌀안장터 만세운동은 일제의 헌병주재소를 향한 시민들의 분노와 항쟁이 가장 격렬하게 드러난 대표적 사건입니다. 이날의 시위는 단지 구호를 외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 행동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다수의 부상자와 희생자, 체포자가 발생했습니다.쌀안장터가 위치한 미원면은 예로부터 장이 열리는 전통시장으로, 조선시대 『동국문헌비고』에도 ‘미원’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할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닌 지역입니다. 이곳은 매월 4일과 9일에 정기적으로 오일장이 서며, 인근 마을 사람들이 장날이면 모여드는 중심지였습니다. ‘쌀안’이라는 지명은..

울산 언양에서 울려 퍼진 대한독립만세! 1919년 언양장터의 역사적 항쟁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3·1운동은 식민지 조선 전역을 휘감은 거대한 저항의 물결이었습니다. 민족대표 33인이 낭독한 독립선언서는 각 지역으로 빠르게 퍼졌고, 울산 역시 그 흐름에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울산의 만세운동은 언양, 남창, 병영 등 여러 지역에서 순차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중 언양의 3·1운동은 1919년 4월 2일, 언양장터에서 본격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이 시위는 단순한 시민들의 자발적 항거가 아닌, 철저히 준비된 조직적인 민족운동이었습니다.특히 언양지역은 천도교 중심의 계획된 항거였으며, 상남면 거리에는 이미 울산 천도교 교구가 설립되어 민족운동의 조직 기반이 갖춰져 있었습니다. 서울 천도교 본부와 직접 연락을 취하였고, 『조선독립신문』과 『국민회보』 등 지하신문..

전주 남밖장터에서 터진 첫 외침, 전북 3·1운동의 시작을 알리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3·1독립만세운동은 전국으로 빠르게 번져나갔습니다. 그러나 전북 전주의 첫 만세운동은 단순히 서울의 흐름을 따라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주는 전라북도의 행정, 교육, 종교의 중심지였으며, 이미 천도교와 기독교 세력을 중심으로 민족운동의 기반이 탄탄히 구축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남밖장터가 있었습니다. 지금의 전주 남부시장 인근인 이곳은 조선시대 전주부성 남문인 풍남문 밖에 형성된 최대의 물산 집산지로, 지역 사회의 상징적 공간이었습니다.전주의 3·1운동은 천도교와 기독교, 학생과 주민이 함께한 조직적이고 계획된 민중운동이었습니다. 3월 13일, 남밖장터에서 시작된 이 시위는 이후 완산정, 초포면, 봉동면, 삼례면 등으로 확산되며 전북 전역을 뒤흔드는 독립의 불..

불탄 교회, 사라진 마을… 화성 제암리 학살, 잊혀선 안 될 1919년의 진실

경기도 화성의 조용한 농촌 마을 제암리는 1919년 4월 15일, 참혹한 비극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이곳은 만세운동이 격렬했다는 이유만으로, 일본 군대에 의해 주민들이 교회에 가둬진 채 총살되고 마을 전체가 불에 타 폐허가 되었던 장소입니다.당시 3·1운동은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졌고, 화성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화성은 송산면과 장안면, 우정면, 발안장터 등지에서 일본 순사 두 명을 처단할 정도로 강력한 저항의 중심지였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 위협을 느낀 일제는 본보기 처벌의 일환으로 제암리를 선택했습니다.아리타 도시오 중위가 이끄는 일본군은 조선인 순사보 조희창의 첩보를 토대로 마을 주민들을 교회당에 가두고, 무차별 총격 후 불을 질렀습니다. 남성뿐만 아니라 어린아이와 여성까지 희생되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