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역사와 인물

불탄 교회, 사라진 마을… 화성 제암리 학살, 잊혀선 안 될 1919년의 진실

나나77. 2025. 7. 11. 10:47

경기도 화성의 조용한 농촌 마을 제암리는 1919년 4월 15일, 참혹한 비극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이곳은 만세운동이 격렬했다는 이유만으로, 일본 군대에 의해 주민들이 교회에 가둬진 채 총살되고 마을 전체가 불에 타 폐허가 되었던 장소입니다.
당시 3·1운동은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졌고, 화성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화성은 송산면과 장안면, 우정면, 발안장터 등지에서 일본 순사 두 명을 처단할 정도로 강력한 저항의 중심지였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 위협을 느낀 일제는 본보기 처벌의 일환으로 제암리를 선택했습니다.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_순국기념관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_순국기념관(국가유산청)


아리타 도시오 중위가 이끄는 일본군은 조선인 순사보 조희창의 첩보를 토대로 마을 주민들을 교회당에 가두고, 무차별 총격 후 불을 질렀습니다. 남성뿐만 아니라 어린아이와 여성까지 희생되었고, 시체는 총검으로 훼손되었습니다.이 학살 사건은 단지 지역적 참사가 아니라, 일제가 의도한 ‘심리적 공포 전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국제 사회에 일본의 잔혹함을 폭로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화성 제암리는 전 세계가 주목한 민간인 학살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 글은 제암리 학살이 어떤 배경에서 기획되었는지, 사건의 전개와 피해, 국제 사회의 반응, 그리고 오늘날 제암리에 남은 역사적 유산과 의미까지 살펴보려 합니다.

 

화성 지역 만세운동, 일제를 자극한 ‘순사 처단 사건’들

1919년 3월 말부터 화성 지역에서는 연달아 격렬한 만세운동이 벌어졌습니다. 특히 송산면 사강리에서의 만세운동 중 일본 순사 노구치 히로미츠가 군중에 의해 처단된 사건은 일제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어 3월 31일 발안장 시위, 4월 3일 장안면과 우정면의 연합 시위에서는 또 다른 순사 가와바타 다로가 총을 난사하다가 군중에 의해 추격당해 사살되었습니다.
이러한 연이은 사건으로 일제 당국은 이 지역 전체를 ‘저항 거점’으로 간주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화수리 주재소 공격과 발안장에서의 돌 투척 시위는 단순한 구호나 외침을 넘어서, 물리적 저항의 양상을 띠기 시작했습니다.
4월 4일부터 13일까지, 일제는 장안면과 우정면 일대를 집중적으로 토벌하며 주도자를 검거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제암리는 여전히 천도교와 기독교 중심의 독립운동 주동자들이 남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로 인해 제암리는 ‘잔존 저항세력의 중심지’로 지목되었습니다.
당시 아리타 도시오 중위는 제20사단 보병 제79연대 소속으로, 이 지역 토벌 작전의 책임자였습니다. 그는 조선인 순사보 조희창의 정보를 바탕으로, 제암리에 강력한 시범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진압이 아닌, 주민 전체에게 공포를 심어주어 향후 저항을 완전히 차단하려는 목적이 있었고, 제암리는 잔혹한 학살극의 무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교회에 가둔 뒤 총살, 불 질러 시신까지 훼손하다

1919년 4월 15일 오후, 아리타 중위는 11명의 병사와 조선인 순사, 그리고 지역 일본인 사사카의 안내를 받아 제암리로 향했습니다. 그들은 15세 이상 남성들을 교회당으로 불러 모았고, 이를 아무 의심 없이 따라간 주민들은 교회 내부에 감금되었습니다.
창문과 출입구는 대못으로 막혔고, 순식간에 사방은 고립되었습니다. 아리타 중위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은 교회를 향해 일제히 사격을 가했습니다. 사람들은 쓰러졌고, 탈출을 시도한 몇 명은 흙벽을 뚫고 달아나다 총탄에 맞아 숨졌습니다. 일부는 칼로 참살당했습니다.
살아남은 유일한 인물은 노경태였습니다. 그는 교회당을 빠져나와 간신히 생존했으며, 훗날 사건의 증언자로 남았습니다.
총격 후 일본군은 교회당에 석유를 뿌려 불을 질렀습니다. 불길은 순식간에 번졌고, 교회는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일본군은 마을의 33채 중 31채의 가옥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참살하며 시체를 총검으로 훼손했습니다.
감리교 전도사 강태성의 부인 김씨, 권사 홍원식의 부인 김씨도 집 밖에서 절규하다 참살되었습니다. 당시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시체에서 타는 냄새가 30리 밖에서도 진동했다고 합니다.
이날 희생자 수는 공식적으로 23명으로 확인되었지만, 미국 총영사 앨런 홀츠버그의 보고서에는 최소 30명, 비공식적으로는 37명 이상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는 단일 지역, 단일 사건으로는 3·1운동 당시 최악의 민간인 학살로 기록됩니다.

 

스코필드 박사, 파란 눈으로 본 조선의 비극

제암리 학살은 자칫 은폐될 뻔했습니다. 그러나 이 잔혹한 사건을 세계에 알린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파란 눈의 독립운동가’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 박사였습니다.
그는 영국 출신의 캐나다계 선교사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일제의 만행에 강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제암리 학살 직후 현장을 방문한 그는, 불에 탄 교회, 훼손된 시신, 폐허가 된 마을을 사진으로 남겼고, 이를 첨부한 보고서를 작성해 세계 언론에 공개했습니다.
스코필드의 활동은 국제 사회의 분노를 이끌었고, 일본은 총독을 경질하며 사태를 무마하려 했습니다. 제암리에 복구비 1,500원을 지급하고, 학살 가담자 아리타 중위를 군사재판에 회부했지만, 그는 무죄 판결을 받고 군 내부 징계로 겨우 ‘근신 30일’을 받는 데 그쳤습니다.
한편 조선인 순사보 조희창은 사건 후 오히려 영등포 경찰서로 승진 발령받았으며, 1949년 반민특위 조사 대상에 올랐으나 반민특위가 와해되면서 처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스코필드 박사의 보고는 학살 사실을 알리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일본이 ‘문명국’으로 자처하면서 어떤 비문명적 범죄를 저질렀는지 폭로하는 증거였고, 조선 민중의 저항이 단순한 폭동이 아닌 ‘정당한 독립운동’임을 국제사회에 각인시키는 계기였습니다.

 

오늘의 제암리, 기억을 지키는 공간으로 남다

제암리는 이제 단순한 마을이 아니라, 3·1운동의 상징적 공간으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제암리교회는 1905년 건립된 이후 1919년 전소되었고, 1938년에 재건되었습니다. 현재는 원래 터에 위치한 교회로, 역사를 기억하는 공간이자 신앙의 장소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1959년에는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탑이 세워졌고, 1982년에는 학살 희생자의 유해를 교회 뒤편에 안치한 순국묘역이 조성되었습니다. 여기에 23인을 상징하는 기념조형물도 함께 설치되어 있습니다.
2001년, 제암교회 옆에는 ‘제암리 3·1 운동 순국 기념관’이 건립되어 사건의 진실을 알리고, 기념탑도 이곳으로 이전되었습니다. 2024년에는 제암교회, 기념탑 및 순국 유적지 등은 그대로 유지하고, 이곳에서 멀지 않은 경기 화성시 향남읍 제암고주로 34에 기존  ‘제암리 3·1운동 순국 기념관’을 확장 이전하여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을 건립해 화성지역 독립운동 역사를 알리고 있습니다.
제암리는 단지 비극의 땅이 아니라, 기억을 지키는 역사의 성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제암리는 묻습니다. “과거를 잊고 사는 민족에게 미래는 있는가?”
그날의 불타던 교회, 울부짖던 아이의 목소리, 총검 앞에 쓰러졌던 이름 없는 이들의 외침은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역사가 아니라, 오늘도 우리가 지켜야 할 ‘정신의 유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