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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만 명이 울부짖은 진주의 외침 – 경남 진주 3·1운동의 진실과 유산

지금의 진주는 평화롭고 고즈넉한 도시지만, 1919년 3월 18일, 이곳은 대한독립을 외치는 거대한 물결로 뒤덮였었습니다. 서울에서 3월 1일 독립선언이 일어난 후, 불과 보름도 채 지나지 않아 경남 진주에서는 전국 두 번째 규모의 대규모 만세 시위가 일어났습니다.놀랍게도 이날 시위에는 무려 연인원 3만 명이 참가하였고, 시위는 단 하루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3월 18일부터 21일까지 4일간 이어진 만세운동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심지어 기생, 걸인, 노동자까지 전 계층이 참여한 진정한 민중의 항거였습니다.진주 3·1운동은 단순한 시위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지도자 김재화를 중심으로 사전에 치밀한 준비가 이루어졌으며, 사립 광림학교 악대의 참여, 태극기 준비, 교섭위원 선정까지 전 과정이 조직적으로 실행되..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 3·1운동 – 노구치 순사 처단 사건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는 지금은 조용한 시골 장터로 인식되지만, 1919년 봄, 이 마을은 조선의 독립을 향한 거대한 함성으로 뒤덮였습니다.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의 물결은 빠르게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수원군 송산면(현 화성시 송산면)에서도 민족의 외침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이곳의 만세운동은 다른 지역과 달리 단순한 시위를 넘어서 일본 순사부장을 직접 처단하는 격렬한 항거로 이어졌습니다.이 운동의 중심에는 당시 35세였던 사강리 출신의 홍면옥이 있었습니다. 그의 전력에는 도박과 횡령으로 인한 전과가 있었지만, 이것이 곧 그의 사상이나 민족의식을 폄하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진 않습니다. 오히려 당시 일제는 영향력 있는 독립운동가들에게 ‘파렴치범’이라는 오명을 씌워 명성을 실추시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