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3·1운동은 식민지 조선 전역을 휘감은 거대한 저항의 물결이었습니다. 민족대표 33인이 낭독한 독립선언서는 각 지역으로 빠르게 퍼졌고, 울산 역시 그 흐름에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울산의 만세운동은 언양, 남창, 병영 등 여러 지역에서 순차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중 언양의 3·1운동은 1919년 4월 2일, 언양장터에서 본격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이 시위는 단순한 시민들의 자발적 항거가 아닌, 철저히 준비된 조직적인 민족운동이었습니다.
특히 언양지역은 천도교 중심의 계획된 항거였으며, 상남면 거리에는 이미 울산 천도교 교구가 설립되어 민족운동의 조직 기반이 갖춰져 있었습니다. 서울 천도교 본부와 직접 연락을 취하였고, 『조선독립신문』과 『국민회보』 등 지하신문을 등사해 유통시키며 민심을 결집시켰습니다.
천도교 교구장 김교경은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입수해 이규장에게 전달했고, 이규장과 곽해진, 유철순, 최해규 등은 유림 대표 이무종, 이규인, 김향수 등과 함께 시위를 계획했습니다. 거사일은 언양 장날인 4월 2일로 정해졌고, 언양은 곧 항쟁의 중심지로 떠올랐습니다.
장날의 선택과 태극기 제작, 밤새 이루어진 거사 준비
시위를 위한 준비는 긴박하고 치밀했습니다. 만세시위에 사용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는 천도교회에서 밤새 등사되었으며, 각 인물은 태극기를 품속에 숨긴 채 장날에 맞춰 움직였습니다. 지역 유림들과 협의하여 만세운동을 준비하면서 일부 천도교 신도들은 지역 유지들을 설득해 모았습니다. 하지만 의거 이틀 전, 주요 인물인 최해규, 곽해진, 유철순 등이 일제에 의해 예비 검속되면서 시위계획에 차질이 발생했습니다.
이에 따라 지도부는 시위 강행 여부를 두고 갈등을 겪었지만, 원로 김성진이 망설이지 말고 진행하자는 격려의 말에 용기를 얻어 시위를 예정대로 진행하기로 결의했습니다.
4월 1일 밤, 이규인의 집에 모인 인물들은 마지막으로 거사 전략을 공유하고 태극기를 대량 제작했습니다. 시위 당일인 4월 2일, 장터로 향한 인물들은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개시했습니다. 이규인은 선봉기를 높이 들었고, 김만출은 군중에게 태극기를 배포했습니다.
당시 장날에는 울산 상남, 중남, 삼동, 두동, 두서면과 양산 하북면 등지에서 약 2,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든 상황이었습니다. 언양은 단순한 장터가 아닌, 지역 농민과 상인들이 모이는 거점이자 만세운동의 최적지였습니다.
2,000명의 군중이 외친 독립만세, 일제의 총탄이 돌아오다
1919년 4월 2일, 언양장터에는 예상보다 훨씬 많은 군중이 몰려들었습니다. 언양뿐 아니라 상남, 중남, 삼동, 두동, 두서면, 양산 하북면, 그리고 멀리서 온 장꾼들과 주민들이 한데 모여 순식간에 2,000여 명으로 불어났습니다. 천도교계 인사들과 유림, 상인, 농민들이 섞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제히 시위를 전개했습니다. 언양면 중심지를 가로지르며 물결치듯 진행된 이 시위는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조선인의 ‘존재 선언’이자 ‘저항의 결정체’였습니다.
시위는 처음엔 평화롭게 진행되었지만, 일본 헌병과 경찰은 이를 무력으로 제압하려 했습니다. 군중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고, 일부는 돌을 던지며 저항의 의지를 불태웠습니다. 이런 민중의 행동은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억압당한 민족의 분노이자 억눌린 자유에 대한 강렬한 갈망이었습니다. 군경은 결국 실탄을 발사했고, 총성과 함께 장터는 아비규환으로 변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성명 미상의 청년 1명과 여성 손립분이 현장에서 총에 맞아 순국했고, 곽해진의 모친과 기생 초운, 김종환, 정달조 등 다수의 민간인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시위대는 잡혀간 동지를 구하기 위해 주재소로 몰려들었고, 일제는 총검으로 해산을 시도했습니다. 결국 체포된 인물은 48명에 달했고, 이들은 대부분 부산형무소와 대구형무소로 이감되어 6개월~1년형의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양 주민들의 항쟁의지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민중은 시위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과 탄압을 겪었지만, 그날의 독립에 대한 열망은 이후 지역 항일운동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언양장터, 잊지 말아야 할 역사와 기억의 공간
현재의 언양장터는 과거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시장은 다른 지역으로 이전되었지만, ‘옛장터길’이라는 이름으로 당시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지금도 울산 시민들에게 만세운동의 성지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1975년에는 ‘산전리 3·1운동 유공비’가 울주군 상북면의 상북중·고등학교 교정에 건립되었고, 2004년에는 상북면사무소로 이전되어 유지되고 있습니다. 비석은 3층 기단 위에 화강암으로 제작된 표석 형태로, 당시 순국자들의 희생을 기리고 있습니다.
또한 1996년에는 ‘삼일독립운동사적비’가 작천정 인근 도로변에 세워졌고, 2014년에는 언양장터 인근으로 이전되었습니다. 이 비석에는 기미독립선언서와 언양 항쟁 참여자, 순국자, 부상자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습니다.
기념비는 단지 돌덩이가 아닙니다. 이는 역사의 생생한 증언이며, 그날 외쳐졌던 “대한독립만세”의 메아리를 지금까지도 품고 있는 상징물입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독립운동의 가치와 지역 항쟁의 힘을 다시금 되새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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