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 40

활명수의 탄생지,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다 – 종로 동화약방과 서울 연통부의 역사

1897년 한성부 서소문 차동, 지금의 서울 순화동에는 단순한 약국이 아닌 한국 제약사와 독립운동사의 결정적 장소가 하나 생겨났습니다. 이곳은 바로 동화약방이었습니다. 이 약방은 단순히 소화제를 제조·판매하던 민간 상점이 아니었습니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약 ‘활명수(活命水)’를 개발한 민병호에 의해 설립된 민족기업이었고, 3·1운동 이후에는 상하이임시정부의 서울 연통부(聯通府)로 기능하며 비밀 연락망과 독립운동 자금의 중계 거점이 되었습니다. 동화약방의 대표 상품 활명수는 단순한 소화제가 아니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물’이라는 이름처럼, 당시 급성 위장질환으로 사망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시절, 활명수는 말 그대로 죽음을 막아주는 기적의 약수로 불렸습니다. 민병호는 한의학 지식과 궁중의 비방, 그리..

부산 백산상회, 무역을 가장한 항일거점 – 부산에서 피어난 안희제의 독립혼

1914년 부산 동광동 한복판에 문을 연 ‘백산상회(白山商會)’는 겉보기엔 곡물과 해산물을 거래하는 평범한 민간 상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조용히, 그러나 뜨겁게 조국의 독립을 도모하던 이들의 은밀한 전진기지였습니다. 백산상회를 설립한 이는 경상남도 의령 출신의 민족 자본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안희제(安熙濟)였습니다. 그는 단순한 사업가가 아니었습니다. 국권 회복의 염원을 가슴에 품고, 상업이라는 외피를 입힌 ‘독립운동 네트워크’를 현실화한 전략가였습니다. 이 상회는 상하이임시정부와 연결된 독립운동 자금 송출 창구이자,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의 연락 기지로 기능했습니다. 겉으론 무역과 유통을 위한 상업 활동을 펼쳤지만, 실제로는 고향 땅에서 팔아 마련한 자본과 지지 세력을 동원해 독립운동의 생명줄을 이어갔습..

물질보다 강한 외침 – 1932년 제주 해녀들의 항일 봉기, 생존을 넘어 민족의 이름으로

1932년 겨울, 바닷속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제주 잠녀(潛女, 일반적으로 ‘해녀(海女)’라고도 합니다. 이후 글에선 해녀라 칭하겠습니다.)들은 자신들의 호흡보다 더 큰 소리를 세상에 내기 시작했습니다. 삶의 터전인 바다에서 물질로 생계를 이어가던 그들에게,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억압이 다가왔습니다. 그 억압은 단순히 저임금이나 부당한 계약 형태가 아니라, 식민지 체제 아래서 일제 당국과 일본 상인, 어용 잠녀조합이 함께 결탁하여 해녀들을 수탈하는 구조 그 자체였습니다. 해녀들은 자신들의 물질 노동이 단순한 경제활동이 아니라 생존의 권리,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자존을 지키기 위한 항거로 이어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제주 해녀들은 오래전부터 제주 해양 문화의 핵심을 이루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1930..

진남관에서 피어난 저항의 불꽃 – 여수공립보통학교 학생운동의 발자취

전라남도 여수는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의 전승 신화가 깃든 군사 요충지이자, 동시에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의 숨은 중심지였습니다. 특히 여수공립보통학교는 충무공 이순신이 머물렀던 유서 깊은 건축물 ‘진남관(鎭南館)’을 교사로 사용하며, 그 공간에서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근대 교육과 항일 운동이 함께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상징성을 가집니다. 이 학교는 1908년 사립 경명학교로 출발해 1911년 공립보통학교로 전환되었고, 1935년까지 진남관을 교사로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여수공립보통학교는 일제의 식민교육에 맞선 학생들의 자주적 저항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특히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까지 이 학교에서는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의 민족차별적 행위에 항의하는 동맹휴교, 항일 격문 배..

폭탄으로 저항한 청년들 – 부민관 투탄 의거와 서울 중구의 항일 역사

1945년 7월 24일, 서울 중구 태평로 한복판에서는 일제 말기 조선에서 벌어진 항일투쟁 가운데 가장 극적인 사건 중 하나가 일어났습니다. 조선총독부가 주도하는 친일 선전대회, '아세아민족분격대회'가 열린 경성부민관에서 폭탄이 터졌던 것입니다. 당시 부민관은 일본 제국주의를 미화하고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던 중심 무대였고, 이곳에 투하된 폭탄은 단순한 물리적 파괴가 아니라, 조선 청년들의 마지막 저항, 끝까지 꺾이지 않은 항일의지를 상징하는 선언이었습니다.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 세 청년은 일제의 패망이 임박한 시점에서도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폭파 작전을 통해, 1급 친일파 박춘금의 선전장을 무력화하며 역사에 길이 남을 '부민관 투탄 의거'를 일으켰습니다. 이 의거는 단순한 테러가 아니라, 식민지 청년들의..

양양에 울려 퍼진 6일간의 함성 – 강원도 최대 규모 3·1운동의 기록

1919년 전국을 뒤흔든 3·1운동은 강원도에서도 크고 작은 형태로 확산되었지만, 그중에서도 양양군에서 벌어진 3·1운동은 규모와 열기 면에서 타 지역과 비교해 손색이 없을 정도로 치열하고도 조직적인 항쟁이었습니다. 양양에서의 만세시위는 단순한 일회성 시위에 그치지 않고, 6일 동안 8회에 걸쳐 전개된 대규모 민중 저항 운동이었습니다. 연인원 1만 5천여 명이 참가한 이 운동은 양양 전역 6개 면, 82개 마을에 걸쳐 확산되었으며, 지역 주민의 강력한 항일 의지와 민족 독립에 대한 열망이 어떠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1919년 4월 3일부터 시작된 이 시위는 4월 9일까지 매일같이 이어졌으며, 특히 마지막 날 벌어진 현북면 기사문리 ‘관 고개’ 시위는 6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일제의 무차별 발포로..

스마트폰으로 날씨부터 미세먼지까지, 정확하고 쉽게 확인하는 생활 속 필수 기능

일상생활에서 날씨 정보는 하루의 활동을 계획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특히 최근 들어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 오존 농도, 자외선 지수 등 기후와 환경 오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단순한 기온 외에도 대기질 정보의 확인이 중요한 생활 습관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텔레비전 일기예보나 신문에 의존했지만, 이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스마트폰을 통해 이 모든 정보를 얻습니다.특히 스마트폰은 단순히 날씨를 보여주는 수준을 넘어서, 사용자의 위치 기반으로 정확한 미세먼지 수치, 초미세먼지 농도, 자외선 지수, 실시간 경보 등을 제공합니다. 또한 다양한 앱이 존재하여 본인의 사용 목적과 환경에 맞게 선택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고령층이나 스마트폰 초보자도 몇 가지 기본적인 기능만 ..

은행 가지 않고도 확인하는 연금 수령 내역, 집에서도 가능한 쉬운 방법 총정리

많은 사람들이 퇴직 후 혹은 일정 연령에 도달한 이후 국민연금, 공무원연금, 사학연금, 군인연금 등 다양한 종류의 연금을 수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연금을 받는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매달 얼마나 지급되는지, 수령 시기는 언제인지, 세금은 얼마나 공제되는지 등을 정기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고령층의 경우 연금 수령 내역을 꼼꼼히 파악하는 것이 의료비나 생활비 계획에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기존에는 이러한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직접 은행에 방문하거나 연금 관련 기관에 전화 문의를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함께 공공기관의 온라인 시스템이 대폭 개선되면서, 집에서도 안전하고 간편하게 연금 수령 내역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해졌습니다...

덕과면에서 시작된 불꽃, 4월 3일 만세의 외침이 남원을 뒤흔들다

1919년, 일제의 식민통치에 항거하여 전 민족이 일어선 3·1운동은 전국 각지로 번져갔습니다. 전라북도의 남원군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남원군의 중심인 남원읍에서는 초기의 삼엄한 경계 탓에 만세운동이 쉽게 발생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남원군 덕과면에서, 조용하지만 거대한 저항의 외침이 터져 나왔습니다. 바로 4월 3일, 덕과면 신양리 도화곡에서 벌어진 800여 명의 만세시위는 남원지역 최초의 3·1운동이었습니다.이 만세운동은 단순한 우발적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지역의 천도교인들 사이에 퍼진 민족 독립의 열망은 기미독립선언서의 전달과 유포, 만세시위 준비를 통해 조직적이고 의도적인 민중 항쟁의 형태로 발전했습니다. 특히 덕과면장 이석기와 면직원 조동선, 유지 이성기 등 지역 공직자와 유력 인..

역사의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진 저항과 비극 – 대전형무소가 남긴 기록

1919년 3·1운동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정면으로 거부한 전 민족적 저항이었습니다.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며 일제의 사법 체계를 마비시킬 정도로 수형자가 급증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감옥의 확장과 신설을 추진하게 되었고, 이러한 배경 속에서 대전형무소가 세워졌습니다. 1919년 10월 19일, ‘대전감옥’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이 행형시설은 이후 점차 규모를 확대해 가며 대전형무소로 승격되었습니다. 대전이 감옥 설치지로 선택된 데에는 여러 가지 지리적, 행정적 요인이 작용했습니다. 대전은 경부선과 호남선 철도의 교차점으로 수감자 이송이 용이했고, 서울과도 가까운 지리적 이점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더불어 당시 대전은 빠르게 성장하는 신흥 도시였기에 대규모 부지를 확보하는 것도 수월했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