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시 상당구 미원면의 ‘쌀안장터’는 단지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이 아니었습니다. 1919년 3월 30일, 이곳은 충북 청주 지역 3·1운동의 정점을 찍는 항거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쌀안장터 만세운동은 일제의 헌병주재소를 향한 시민들의 분노와 항쟁이 가장 격렬하게 드러난 대표적 사건입니다. 이날의 시위는 단지 구호를 외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 행동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다수의 부상자와 희생자, 체포자가 발생했습니다.
쌀안장터가 위치한 미원면은 예로부터 장이 열리는 전통시장으로, 조선시대 『동국문헌비고』에도 ‘미원’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할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닌 지역입니다. 이곳은 매월 4일과 9일에 정기적으로 오일장이 서며, 인근 마을 사람들이 장날이면 모여드는 중심지였습니다. ‘쌀안’이라는 지명은 ‘산안(山安)’에서 음운 변화로 유래되었고, ‘미원(米院)’은 율봉역(栗峯驛)에 딸린 숙소인 ‘율봉원’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전해집니다.
쌀안장터의 장날은 단지 시장경제의 흐름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장터는 민심이 모이고, 정보가 오가며, 혁명의 불씨가 퍼지는 공간이었습니다. 특히, 일제가 조선을 식민 통치하며 언론과 통신을 통제하던 시대에 장터는 자연스러운 커뮤니티이자 저항의 물리적 무대였습니다. 1919년 3월, 전국 곳곳에서 3·1운동이 퍼져나가던 가운데, 쌀안장터도 이러한 거대한 역사적 흐름에 편입되며 마침내 폭발했습니다.
신경구와 미원 청년들,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을 외치다
청주 쌀안장터 3·1운동의 중심인물은 미원면 용곡리에 거주하던 신경구(申敬求)였습니다. 그는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확산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도 이 항쟁의 물결에 동참하기로 결심합니다. 신경구는 이수란, 이용실 등 지역 청년들과 함께 태극기를 제작하고 독립선언서를 준비하였으며, 장날에 맞춰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이들은 미원면 내의 동지들을 규합하며 철저히 준비했고, 드디어 3월 30일 그날이 찾아왔습니다.
오후 1시경, 쌀안장터에 사람들이 북적일 무렵, 신경구를 비롯한 20여 명이 먼저 태극기를 들고 장터 한가운데로 나섰습니다. 그들은 “대한독립만세”를 힘차게 외치기 시작했고, 이를 본 장터에 있던 1,000여 명의 군중이 일제히 동조했습니다. 장터는 순식간에 태극기의 물결과 만세 함성으로 뒤덮였으며, 일제 헌병의 감시를 받고 있었음에도 사람들은 두려움 없이 광장 중앙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움직임은 곧바로 인근의 미원 헌병주재소에 포착되었고, 헌병들은 급히 출동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했습니다. 시위의 중심에 있던 신경구는 체포되었고, 그가 들고 있던 태극기도 빼앗겼습니다. 그는 미원 주재소로 끌려갔으며, 시위대를 향한 위협적 발포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시위대는 이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신경구의 체포에 격분한 군중 1,000여 명은 곧장 미원 헌병주재소로 향했고, 건물 일부를 파괴하며 실질적 저항에 돌입했습니다. 시위는 단지 상징적인 행위가 아닌, 물리적 항쟁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군중은 헌병주재소 앞에서 “체포자를 석방하라!”, “우리는 독립된 민족이다!”라며 격렬하게 항의했고, 이에 일본 헌병은 청주경찰서에 긴급 요청을 보냈습니다. 경찰수비대가 도착하며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습니다.
발포와 피, 헌병주재소 앞에 쓰러진 이들
미원 헌병주재소 앞에 몰려든 시위대는 단지 분노에 찬 외침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실질적으로 건물 벽을 부수고, 창문을 깼으며, 문을 흔들며 체포자의 석방을 요구했습니다. 이를 본 일본 헌병은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꼈고, 곧이어 무차별적인 발포를 명령했습니다. 시위대를 향한 실탄 사격이 시작되었고, 그 순간 쌀안장터는 순식간에 비명과 피로 물들었습니다.
1명의 시위 참여자가 현장에서 총을 맞고 숨졌고, 이름 없이 희생된 이들의 부상도 적지 않았습니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망자는 1명이었지만, 총상을 입고 중태에 빠진 이들, 나중에 고문과 체포로 생을 잃은 이들을 포함하면 그 피해는 절대 작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민간인이 장터에서 흩어졌지만, 그들은 항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시위는 이후에도 주변 마을에서 산상 봉화 시위로 이어졌고, 이는 청주 지역 전체의 항일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날의 항쟁으로 체포된 인물은 총 14명입니다. 이들은 곧 청주경찰서로 이송되어 고문을 받았고, 일부는 장기 형을 선고받아 대전형무소, 대구형무소 등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항쟁의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감옥 안에서도 독립의 당위를 외쳤습니다. 민중의 저항은 비록 총칼 앞에 좌절되는 듯했으나, 정신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청주 쌀안장터의 만세운동은 단지 지역 단위의 작은 시위가 아니었습니다. 이는 충청북도 청주시 일대에서 벌어진 항일운동 중 최대 규모이자, 가장 격렬한 형태의 민중 저항이었습니다. 민중 스스로가 지도자 없이도 행동에 나섰고, 생명을 담보로 자유를 외친 그날의 모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 역사로 남아 있습니다.
쌀안장터 만세운동의 기억을 잇다 – 기념비와 후손의 과제
오늘날 쌀안장터는 이전과 같은 장터의 형상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시장은 여전히 재래시장으로 기능하지만, 근대적 건물과 도로로 인해 과거의 모습은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 역사적 의미는 지역사회와 후손들에 의해 꾸준히 기려지고 있습니다.
현재 미원면 미원시내2길 14-4 일대는 당시 시위가 벌어졌던 실제 장소입니다. 인근에는 당시의 헌병주재소 자리에 세워진 미원치안센터(미원면 미원시내2길 43)가 위치하고 있으며, 그 옆에는 1996년 건립된 ‘쌀안장터 만세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 기념비는 단지 돌비석이 아닌, 청주 민중의 항일 의지를 새긴 정신적 상징물입니다.
기념비에는 시위 주도자와 순국자의 이름은 물론, 당시 만세운동의 의미와 역사적 맥락이 새겨져 있습니다. 매년 3월이면 지역 주민들과 학교, 청소년 단체가 이곳을 방문해 헌화하며 독립운동 정신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디지털 기록 아카이빙과 청소년 체험교육도 함께 추진되며, 그 역사적 의미는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아쉬운 점도 많습니다. 쌀안장터 만세운동은 지역 교과서나 대중 서적에서 크게 조명받지 못하고 있으며, 전국적 인지도가 부족한 실정입니다. 이는 지역 독립운동의 역사를 우리가 스스로 기록하고 알리는 노력이 더 필요하다는 점을 알려줍니다.
청주는 단지 행정의 중심지가 아니라, 일제 강점기에 조용한 민중의 분노가 가장 뜨겁게 타올랐던 곳입니다. 그 중심에 있었던 쌀안장터는 오늘날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날 당신이라면 태극기를 들 수 있었습니까?” 우리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으려면, 그날의 외침을 기억하고 계승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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