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3·1독립만세운동은 전국으로 빠르게 번져나갔습니다. 그러나 전북 전주의 첫 만세운동은 단순히 서울의 흐름을 따라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주는 전라북도의 행정, 교육, 종교의 중심지였으며, 이미 천도교와 기독교 세력을 중심으로 민족운동의 기반이 탄탄히 구축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남밖장터가 있었습니다. 지금의 전주 남부시장 인근인 이곳은 조선시대 전주부성 남문인 풍남문 밖에 형성된 최대의 물산 집산지로, 지역 사회의 상징적 공간이었습니다.
전주의 3·1운동은 천도교와 기독교, 학생과 주민이 함께한 조직적이고 계획된 민중운동이었습니다. 3월 13일, 남밖장터에서 시작된 이 시위는 이후 완산정, 초포면, 봉동면, 삼례면 등으로 확산되며 전북 전역을 뒤흔드는 독립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선언서 인쇄, 태극기 제작, 학생 동원, 장날 활용 등 전략적으로 준비된 조직적 민족항쟁이었습니다.
오늘날 남부시장으로 불리는 이 장소에는 2000년 ‘전주 3·1운동 발상지’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전주 3·1운동의 발단과 전개, 핵심 인물과 그 정신, 그리고 오늘날 그 의미가 어떻게 계승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천도교와 기독교의 교차점, 시위를 조직한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
전주 3·1운동은 천도교와 기독교 두 종교세력이 각각 독립적으로 움직이면서도, 자연스럽게 상호 협력하며 전개되었습니다. 3월 1일, 서울에서 인종익이 전주 천도교 교구실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고, 김진옥과 배상근 등이 이를 바탕으로 전북 김제, 익산, 임실, 정읍 등지에 확산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전주를 중심으로 각지에 선언서를 배포하고 민중을 조직했습니다.
한편 기독교계에서는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가 핵심 거점 역할을 했습니다. 최종삼, 김가전, 윤건중, 이수연, 김종곤 등이 학생들을 조직하고, 태극기와 격문을 은밀히 제작했습니다. 신흥학교 지하실은 독립운동 준비의 본부가 되었으며, 수천 장의 선언서를 등사기로 인쇄하고, 각 학교와 교회에 비밀리에 배포하였습니다.
이러한 조직적 움직임은 일제에 감지되었고, 경찰은 종교단체와 학생 집단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습니다. 하지만 운동 주도자들은 장날을 활용하여 최대한 많은 군중을 끌어모으기로 했습니다. 시위일은 전주 장날인 3월 13일로 정해졌습니다. 강선칠은 보통학교 교정에 태극기가 담긴 가마니를 가져다 놓았고, 마지막 준비가 끝난 그 시점부터 시위는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전주의 3·1운동은 ‘우발적 저항’이 아니라, 다수의 종교인, 교육자, 청년들이 치밀하게 준비한 체계적 항쟁이었다는 점에서 지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전주 거리로 쏟아져 나온 만세의 물결, 그날의 전개와 확산
1919년 3월 13일, 전주 시내 곳곳은 갑작스럽게 태극기의 물결로 뒤덮였습니다. 오후 1시경, 공립 제2보통학교 인근부터 대정정 우체국까지 수백 명의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벌였습니다. 선두에는 이운영이 높이 태극기를 들고 외침을 주도했고, 강선칠, 김정희, 김병학, 박덕주, 이승우 등 다수의 지역 청년들이 함께 참여했습니다.
이들은 남밖장터를 시작으로 서정, 본정, 우편국 인근까지 진출하면서 경찰과 충돌했습니다. 결국 다수의 시위 주동자들이 체포되었고, 그중 다수는 투옥되어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은 운동을 멈추게 하지 않았습니다.
3월 14일에는 완산교 인근에서 다시 시위가 벌어졌고, 권봉화, 김경신, 박상선 등 수십 명이 참가해 만세를 외쳤습니다. 3월 17일에는 초포면 송전리 들판에서 주민 20여 명이 자발적으로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우리만 잠잠할 수 없다”는 외침은 전북 농촌의 항쟁 정신을 보여줍니다.
3월 21일 봉동면 장날에는 학생 정기동과 노순석이 시위를 주도하였고, 삼례 장날에도 수백 명이 기차역을 향해 만세를 외쳤습니다. 이후에도 상인들은 일본 국기를 거부하며 자발적 철시운동을 벌였고, 4월 3일 김봉근은 일본기를 단 상인에게 항의하며 “조선 상인이 독립을 외치는 이때, 일본 국기를 걸고 장사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고 외쳤습니다.
이처럼 전주 3·1운동은 단지 하루 만의 일이 아닌, 3월 한 달 동안 끊임없이 지속된 지역 전반의 항쟁이었습니다.
교과서에 없는 역사, 전주의 만세운동을 기억하는 방법
오늘날 전주의 3·1운동은 단순한 지역행사로만 인식되기 쉽지만, 사실 그 역사적 깊이와 파급력은 절대 작지 않습니다. 남밖장터에서 시작된 이 항쟁은 일제의 경계선상에 있던 여러 지역(완산, 초포, 봉동, 삼례 등)으로 확산되었으며, 다수의 학교, 종교 단체, 상인, 농민이 동참한 민족적 봉기였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기리기 위해 2000년 전북인권선교협의회는 전주시 완산구 매곡교 인근에 ‘전주 3·1운동 발상지’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기념비가 세워진 장소는 현재의 남부시장, 즉 옛 남밖장터 일대로, 이곳은 조선시대 풍남문 밖에서 형성된 전주의 대표 장터였습니다.
이 기념비에는 당시 시위의 시작 지점이었음을 알리는 문구와 함께 전주시민의 독립정신을 기리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또한 남부시장 입구에는 관련 표지석도 함께 설치되어 있어, 이 지역이 단순한 시장이 아니라 역사 교육의 현장임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여전히 전주의 만세운동은 많은 이들에게 생소합니다. 교과서에 한 줄 소개되지 않는 지역 만세운동은 잊히기 쉽고, 후손들은 그 역사를 모른 채 살아가기 쉽습니다.
전주 남밖장터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이 지역사회의 기억 속에 제대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이러한 기념물 외에도 체험 프로그램, 다큐멘터리, 교육 자료 등이 꾸준히 제작되고 활용되어야 합니다.
3·1운동 정신은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이며, 지역의 정체성으로 이어져야 할 유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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