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7월 24일, 서울 중구 태평로 한복판에서는 일제 말기 조선에서 벌어진 항일투쟁 가운데 가장 극적인 사건 중 하나가 일어났습니다. 조선총독부가 주도하는 친일 선전대회, '아세아민족분격대회'가 열린 경성부민관에서 폭탄이 터졌던 것입니다. 당시 부민관은 일본 제국주의를 미화하고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던 중심 무대였고, 이곳에 투하된 폭탄은 단순한 물리적 파괴가 아니라, 조선 청년들의 마지막 저항, 끝까지 꺾이지 않은 항일의지를 상징하는 선언이었습니다.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 세 청년은 일제의 패망이 임박한 시점에서도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폭파 작전을 통해, 1급 친일파 박춘금의 선전장을 무력화하며 역사에 길이 남을 '부민관 투탄 의거'를 일으켰습니다. 이 의거는 단순한 테러가 아니라, 식민지 청년들의 정치적 결단이었고, 항일운동의 마지막 장을 장식한 분노의 폭발이었습니다. 지금 이 사건의 현장은 서울특별시의회 앞 도로변에 비석으로 남아 있지만, 많은 이들에게 여전히 잘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역사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사건을 재조명하고, 서울 중구 한복판에 숨겨진 항일 역사의 진면목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 땅에서 시작된 저항, 대한애국청년당의 결성과 거사 계획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 세 사람의 항일투쟁은 일본 내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42년, 일본 가와사키시에 위치한 일본강관주식회사에서 견습공으로 근무하던 조문기는 현장에서 벌어진 민족차별에 항의하는 시위를 주도하였습니다. 이때 함께하던 유만수, 강윤국과 뜻을 모은 조문기는 귀국 후 본격적인 친일파 처단 계획에 돌입합니다. 1945년 5월, 이들은 '대한애국청년당'을 결성하고 비밀결사체로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조직에는 총 6인이 참여했으며, 명칭은 일제의 문헌 『조선독립소요사』에서 발견한 이름에서 착안하였습니다. 이들은 친일파 주요 인사 3명과 조선총독부 인사 3명을 처단 대상으로 지목하고, 그중에서도 박춘금을 1순위로 설정합니다. 박춘금은 일제와 긴밀하게 협력하며 조선인을 학살하고 친일정치를 주도했던 악명 높은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주도하던 '아세아민족분격대회'는 일본의 침략을 미화하고 아시아 민족 간의 거짓 단결을 내세운 극단적 친일행사였으며, 이를 통해 일제의 말기 전쟁 동원을 정당화하려는 시도였습니다.
민간인을 보호하며 치밀하게 감행된 서울 부민관 투탄
서울 중심지에 위치한 경성부민관은 고정 객석만 1,800석에 달하는 거대한 건축물로, 문화예술 공연장에서 일제 군국주의 선전장으로 기능이 전환된 장소였습니다. 1945년 7월 24일, 수천 명의 군중이 강제로 동원된 가운데, 아세아민족분격대회가 열렸습니다. 박춘금을 비롯해 중국, 만주, 일본의 연설자들이 침략 전쟁의 정당성과 아세아 민족 단결을 외치며 무대를 장식하던 그 시각, 조문기와 유만수는 무대 아래와 계단 아래에 시한폭탄을 설치했습니다. 민간인의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무대를 중심으로 배치한 이들의 판단은 민족주의적이면서도 이성적인 판단이었습니다. 곧이어 발생한 폭발로 인해 대회는 완전히 무산되었고, 대의당의 정치적 기획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이 사건은 침략전쟁에 대한 민중 저항이었으며, 이미 붕괴되어 가던 일제 체제를 결정적으로 흔드는 상징적 사건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박춘금의 현상금 5만 원과 실패한 검거, 그리고 광복
부민관에서의 폭파 사건 이후, 분노한 박춘금은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거액인 5만 원의 현상금을 걸고 범인을 찾기 위한 대대적인 수사를 요청했습니다. 이 금액은 2025년 물가 기준으로 약 86억 원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였으며, 그의 재산과 일제에 대한 충성도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박춘금이 재산을 털고, 일제 경찰이 청년 수백 명을 연행해 조사하더라도 결국 조문기 일당을 체포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 사건 이후 불과 3주 만에 벌어집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은 연합국에 항복하고 조선은 광복을 맞습니다. 일제는 조선 청년들의 저항을 끝내 꺾지 못한 채 사라졌고, 부민관 투탄 의거는 모든 항일운동의 대미를 장식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아세아 민족의 흥분은 바로 우리가 폭발시킨 것이다.” 이 한 마디는 단순한 자부심이 아니라, 무력 속에서 피어난 민족적 정의의 외침이었습니다.
경성부민관의 역사적 변화와 오늘날의 의미
1935년에 지어진 경성부민관은 처음엔 경성의 문화예술 중심지였지만, 일제의 침략 전쟁이 본격화되며 군국주의의 선전장이 되었습니다. 이후 1945년 광복 이후에는 미군정청에 귀속된 적산 건물로 편입되었고, 1950년부터는 국립극장, 1954년부터는 국회의사당으로 기능하였습니다. 국회가 여의도로 이전한 후에는 세종문화회관 별관으로도 사용되었고, 1991년 이후부터 현재까지는 서울특별시의회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경성부민관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공공 용도로 활용되어 왔지만, 부민관 투탄 의거는 그 장소에 각인된 영원한 역사로 남아 있습니다. 현재 서울특별시의회 정문 옆 도로변에는 ‘부민관 폭파 의거 터’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으며, 이는 단순한 안내판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청년들의 결단을 기억하고, 후손들이 이 역사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한 조용한 경고이자 약속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사건을 다시 조명하는 이유는 단지 과거를 되새김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정의와 저항의 가치가 필요한 순간, 우리는 부민관에서 울려 퍼진 조선 청년들의 외침을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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