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독립운동 역사와 인물 33

3만 명이 울부짖은 진주의 외침 – 경남 진주 3·1운동의 진실과 유산

지금의 진주는 평화롭고 고즈넉한 도시지만, 1919년 3월 18일, 이곳은 대한독립을 외치는 거대한 물결로 뒤덮였었습니다. 서울에서 3월 1일 독립선언이 일어난 후, 불과 보름도 채 지나지 않아 경남 진주에서는 전국 두 번째 규모의 대규모 만세 시위가 일어났습니다.놀랍게도 이날 시위에는 무려 연인원 3만 명이 참가하였고, 시위는 단 하루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3월 18일부터 21일까지 4일간 이어진 만세운동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심지어 기생, 걸인, 노동자까지 전 계층이 참여한 진정한 민중의 항거였습니다.진주 3·1운동은 단순한 시위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지도자 김재화를 중심으로 사전에 치밀한 준비가 이루어졌으며, 사립 광림학교 악대의 참여, 태극기 준비, 교섭위원 선정까지 전 과정이 조직적으로 실행되..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 3·1운동 – 노구치 순사 처단 사건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는 지금은 조용한 시골 장터로 인식되지만, 1919년 봄, 이 마을은 조선의 독립을 향한 거대한 함성으로 뒤덮였습니다.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의 물결은 빠르게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수원군 송산면(현 화성시 송산면)에서도 민족의 외침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이곳의 만세운동은 다른 지역과 달리 단순한 시위를 넘어서 일본 순사부장을 직접 처단하는 격렬한 항거로 이어졌습니다.이 운동의 중심에는 당시 35세였던 사강리 출신의 홍면옥이 있었습니다. 그의 전력에는 도박과 횡령으로 인한 전과가 있었지만, 이것이 곧 그의 사상이나 민족의식을 폄하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진 않습니다. 오히려 당시 일제는 영향력 있는 독립운동가들에게 ‘파렴치범’이라는 오명을 씌워 명성을 실추시키..

불타는 뽕나무와 독립군 나무 – 영동군 학산면에서 피어난 3·1운동의 함성

충청북도 영동군은 예부터 삼남(三南)의 교통 요충지로 꼽혀왔습니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잇는 삼도봉이 있는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는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활발했던 관문이었고,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들의 비밀 통로로 기능했습니다. 그 중심에 위치한 학산면 박계리는 조용한 농촌 마을처럼 보이지만, 그 땅 위에는 항일의 피와 눈물이 스며든 역사가 존재합니다.1919년 3월,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3·1운동의 물결은 이 작은 마을에서도 뜨겁게 타올랐습니다. 특히 박계리에서 시작된 시위는 단순한 만세 외침을 넘어, 실제로 면사무소를 점거하고 일제의 식민 통치를 상징하던 시설들을 파괴하는 등 적극적이고 과감한 저항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시위의 상징적 장면 중 하나는 바로 ‘뽕나무 묘목 2만 7천 그루’를 불태..

목포를 울린 여학생들의 함성 – 정명여학교 4.8만세운동의 기억

전라남도 목포시 양동에 자리한 정명여학교는 지금은 평범한 여자중고등학교로 알려져 있지만, 100여 년 전 그 교정은 뜨거운 함성으로 뒤덮인 항일운동의 중심지였습니다.1919년 4월 8일, 목포의 4.8만세운동은 이 학교의 교사와 여학생들에 의해 촉발되었습니다.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선언은 전국으로 퍼졌고, 목포 역시 독립의 열망으로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목포의 항일운동은 정명여학교와 영흥학교 학생들 양동교회 신도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특히 정명여학교의 여학생들이 주축이 되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의를 지닙니다.그들은 태극기를 손으로 제작하고, 독립선언서를 숨겨 날랐으며, 시내를 누비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일제의 감시 속에서도 무너짐 없이 거사를 준비했고, 그날 목포는 이들의 외침..

포항 덕성장터에서 울려 퍼진 만세의 함성 – 1919년 3월 22일, 대전리 사람들의 항일투쟁

경상북도 포항시 청하면의 덕성장터는 현재는 평범한 상가 건물들이 줄지어 있는 도심 일각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100여 년 전, 이곳은 경상북도 일대에서 가장 격렬한 3·1운동이 벌어진 역사의 현장이었습니다. 덕성장터는 1919년 3월 22일, 독립을 향한 외침으로 가득 찼습니다. 바로 그날, 송라면 대전리 출신의 기독교인들이 조직한 만세운동이 이곳에서 폭발하듯 일어났던 것입니다.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은 빠르게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경북 포항 지역 역시 그 흐름에 동참했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의 운동은 단순한 동조 시위가 아니었습니다. 덕성장터 만세운동은 철저한 준비와 공동체의 신앙, 조직력이 어우러진 지역 중심의 독립운동이었습니다. 주도세력은 대전리 대전교회 출신의 기독교 신자들이었고, 이들은 거사 ..

공주에서 피어난 독립의 불꽃, 영명학교 3·1운동의 진실

충청남도 공주에는 조용히 그 자리를 지켜온, 오래된 학교가 있습니다. 바로 ‘영명학교’입니다. 언뜻 보면 평범한 기독교계 사학이지만, 그 교정은 1919년 4월 1일, 공주 지역에서 울려 퍼진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출발한 곳이었습니다.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의 열기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공주 역시 그 대열에 빠지지 않았습니다.공주에서의 만세운동의 그 중심에는 영명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비밀리에 회합을 열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며 조직적인 운동을 준비했습니다. 영명학교는 단순한 교육기관을 넘어 항일운동의 중심지로, 당시 충청도 지역의 청년 독립운동가들이 집결한 공간이었습니다. 지금은 당시의 교사나 기숙사는 사라지고 터만 남았지만, 그 의미는 결코 희미해지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공주 ..

만세로를 걷다 – 동두천에서 울려 퍼진 독립의 외침

누구나 한 번쯤 지나치는 동두천의 평화로. 평범한 도심의 풍경 속에서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는 이 길에, 2023년부터는 특별한 이름이 붙었습니다. 그 이름은 바로 ‘3.1.만세로’. 이 명예도로는 단순한 도로명이 아닙니다. 이는 104년 전, 이 땅의 주민들이 한 목소리로 외쳤던 “대한독립만세”의 울림이 고스란히 새겨진 상징입니다. 지금 우리가 걷는 이 거리 한복판에서, 누군가는 태극기를 들고 목숨을 걸고 만세를 외쳤습니다.동두천에서 일어난 이 운동은, 서울의 물결이 지역으로 흘러들어가며 하나의 ‘현장’으로 완성된 민족 저항의 실체였습니다. 도로 하나에 담긴 정신은 한 지역의 기억을 넘어, 전국적인 독립운동의 한 조각을 복원하는 데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동두천 3·1운동의 발생 배경, 준비 과정, 역..

활명수의 탄생지,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다 – 종로 동화약방과 서울 연통부의 역사

1897년 한성부 서소문 차동, 지금의 서울 순화동에는 단순한 약국이 아닌 한국 제약사와 독립운동사의 결정적 장소가 하나 생겨났습니다. 이곳은 바로 동화약방이었습니다. 이 약방은 단순히 소화제를 제조·판매하던 민간 상점이 아니었습니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약 ‘활명수(活命水)’를 개발한 민병호에 의해 설립된 민족기업이었고, 3·1운동 이후에는 상하이임시정부의 서울 연통부(聯通府)로 기능하며 비밀 연락망과 독립운동 자금의 중계 거점이 되었습니다. 동화약방의 대표 상품 활명수는 단순한 소화제가 아니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물’이라는 이름처럼, 당시 급성 위장질환으로 사망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시절, 활명수는 말 그대로 죽음을 막아주는 기적의 약수로 불렸습니다. 민병호는 한의학 지식과 궁중의 비방, 그리..

부산 백산상회, 무역을 가장한 항일거점 – 부산에서 피어난 안희제의 독립혼

1914년 부산 동광동 한복판에 문을 연 ‘백산상회(白山商會)’는 겉보기엔 곡물과 해산물을 거래하는 평범한 민간 상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조용히, 그러나 뜨겁게 조국의 독립을 도모하던 이들의 은밀한 전진기지였습니다. 백산상회를 설립한 이는 경상남도 의령 출신의 민족 자본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안희제(安熙濟)였습니다. 그는 단순한 사업가가 아니었습니다. 국권 회복의 염원을 가슴에 품고, 상업이라는 외피를 입힌 ‘독립운동 네트워크’를 현실화한 전략가였습니다. 이 상회는 상하이임시정부와 연결된 독립운동 자금 송출 창구이자,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의 연락 기지로 기능했습니다. 겉으론 무역과 유통을 위한 상업 활동을 펼쳤지만, 실제로는 고향 땅에서 팔아 마련한 자본과 지지 세력을 동원해 독립운동의 생명줄을 이어갔습..

물질보다 강한 외침 – 1932년 제주 해녀들의 항일 봉기, 생존을 넘어 민족의 이름으로

1932년 겨울, 바닷속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제주 잠녀(潛女, 일반적으로 ‘해녀(海女)’라고도 합니다. 이후 글에선 해녀라 칭하겠습니다.)들은 자신들의 호흡보다 더 큰 소리를 세상에 내기 시작했습니다. 삶의 터전인 바다에서 물질로 생계를 이어가던 그들에게,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억압이 다가왔습니다. 그 억압은 단순히 저임금이나 부당한 계약 형태가 아니라, 식민지 체제 아래서 일제 당국과 일본 상인, 어용 잠녀조합이 함께 결탁하여 해녀들을 수탈하는 구조 그 자체였습니다. 해녀들은 자신들의 물질 노동이 단순한 경제활동이 아니라 생존의 권리,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자존을 지키기 위한 항거로 이어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제주 해녀들은 오래전부터 제주 해양 문화의 핵심을 이루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1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