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역사와 인물

3만 명이 울부짖은 진주의 외침 – 경남 진주 3·1운동의 진실과 유산

나나77. 2025. 7. 7. 14:36

지금의 진주는 평화롭고 고즈넉한 도시지만, 1919년 3월 18일, 이곳은 대한독립을 외치는 거대한 물결로 뒤덮였었습니다. 서울에서 3월 1일 독립선언이 일어난 후, 불과 보름도 채 지나지 않아 경남 진주에서는 전국 두 번째 규모의 대규모 만세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놀랍게도 이날 시위에는 무려 연인원 3만 명이 참가하였고, 시위는 단 하루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3월 18일부터 21일까지 4일간 이어진 만세운동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심지어 기생, 걸인, 노동자까지 전 계층이 참여한 진정한 민중의 항거였습니다.
진주 3·1운동은 단순한 시위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지도자 김재화를 중심으로 사전에 치밀한 준비가 이루어졌으며, 사립 광림학교 악대의 참여, 태극기 준비, 교섭위원 선정까지 전 과정이 조직적으로 실행되었습니다. 특히 시위 중 일본 경찰이 시위자 옷에 검정 잉크를 던져 나중에 체포하는 방식은 이 시위의 강도와 긴박함을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였습니다.

일제강점기 영남포정사
일제강점기 영남포정사(출처: 독립기념관)


이 글은 진주 3·1운동의 전개 과정, 다양한 계층의 참여, 일본 경찰의 진압 방식과 그 이후의 여파, 그리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역사 유적지와 기념비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김재화와 조직된 봉기 – 3월 18일의 진주

진주의 3·1운동은 우연한 민중 봉기가 아니었습니다. 2월 말, 고종황제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돌아온 김재화, 박대업, 심두섭, 정용길 등은 3·1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밀반입했습니다. 이들은 김재화의 집에서 수차례 회합을 가진 뒤, 3월 18일 장날을 기점으로 거사를 결의했습니다.
이때 사립 광림학교의 졸업생이자 악대원이었던 천명규, 박성오, 김영조, 이영규 등이 선두에서 나팔을 불며 시위의 신호를 맡기로 했습니다. 나팔 소리가 울린 순간, 진주의 각처에서 모인 수천 명의 군중이 일제히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진주성을 돌기 시작했습니다.
시위는 비봉산, 대안동, 봉곡동, 재판소, 촉석공원, 중앙시장 등 전역으로 퍼졌고, 오후 4시경 시위대는 경남도청이 있던 영남포정사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군중 수는 약 3만 명에 달했으며, 이는 전국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3·1운동이었습니다.
일본 경찰은 시위자들을 분리하여 주동자를 색출하기 위해 기상천외한 방식—검정 잉크를 시위자 옷에 뿌리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이 잉크는 추후 시위자 검거의 표식이 되었고, 이날 하루에만 300명 이상이 체포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시위가 아닌, 민족 자각과 조직화된 저항의 상징이었고, 진주가 남긴 자랑스러운 항일투쟁의 기록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기생과 걸인까지 – 모든 계층이 하나 된 만세운동

진주 3·1운동의 특징 중 하나는 그 참여 계층의 폭이 전국적으로 유례가 없을 만큼 넓었다는 점입니다. 3월 18일 밤 7시경, ‘노동독립단’이라는 이름의 시위대가 거리에 나타나 만세 시위를 이어갔고, 그로부터 2시간 후에는 ‘걸인독립단’이 시위를 주도했습니다.
이들은 참여에 그치지 않고,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을 외쳤습니다. 다음 날인 3월 19일에는 진주 읍내의 모든 상점이 자발적으로 문을 닫고, 만세운동에 동조하는 철시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오전 11시, 약 7,000명의 군중이 다시 거리로 나섰고, 악대를 선두로 태극기를 들고 시가행진을 벌였습니다. 특히 ‘기생독립단’의 등장은 진주 3·1운동의 상징적 장면 중 하나였습니다. 이들은 태극기를 앞세워 남강과 촉석루 일대를 돌며 만세를 외쳤고, 결국 기생 6명이 체포되었습니다.
그날 밤 11시까지도 시위는 산발적으로 이어졌고, 약 100명이 추가로 검거되었으며, 그들 대부분은 학생이었습니다. 3월 20일에도 시위는 계속되었고, 학생들의 만세운동 계획이 발각되자 학부모와 가족들이 시위에 나서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진주의 3·1운동은 특정 계층이나 지식인이 주도한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이, 여성이자 기생, 청년과 노동자, 그리고 이름 없는 걸인들까지. 모든 이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독립을 외쳤던, 진정한 민중 봉기였습니다.

 

탄압과 검거, 그리고 주변 지역으로 번지는 저항

진주 읍내에서 벌어진 대규모 만세운동은 인근 면 단위 지역으로도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금곡면에서는 면서기 김영재, 금산면에서는 이교륜이 중심이 되어 군중을 규합하였지만, 일본 헌병의 조기 대응으로 체포되어 복역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3월 18일 정촌면에서는 강재순, 강한순, 허현, 이종락 등이 주도하여 약 5,000여 명이 참가한 만세운동이 벌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정촌면은 진주 읍내와 함께 3·1운동 중심지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3월 22일과 25일에는 수곡면 수곡장터에서, 3월 25일과 31일에는 문산면 소문리 순사주재소 앞에서, 4월 8일에는 일반성면 반성장에서 각각 대규모 만세시위가 전개되었습니다.
이들 시위 역시 진주 3·1운동이 가진 민중 중심의 성격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었고, 초기 지도부의 체포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저항이 이어졌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집니다.
이처럼 진주 지역의 항일운동은 단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도 지역 사회의 연대로 끊임없이 재점화되었던 불꽃이었습니다. 이는 향후 진주 시민들이 항일운동 정신을 지역 정체성과 자긍심으로 삼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기념비와 역사 속 유산, 진주의 정신을 잇다

현재 진주성 내에는 3·1운동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 기념비는 1971년 3월 1일, 시민들의 자발적인 모금과 참여로 건립되었으며, 진주 3·1운동의 상징이자 선열들의 희생을 기리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진주시 하촌동 마을회관 앞에는 ‘3·1운동 발상지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곳은 김재화의 생가지이자 당시 만세운동 계획이 실제로 논의되었던 역사적인 공간입니다.
또한 금산면 갈전리에는 진주군 각 면(문산면, 반성면, 금산면, 정촌면 등)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선열들을 기리기 위한 ‘진주 항일투사 추모비’가 세워져 있어, 지역 전체가 독립운동의 흔적을 품고 있습니다.
오늘날 진주의 3·1운동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을 넘어, 공동체의 정신적 기반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외침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후손들은 여전히 그날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으며, 진주는 조용히 그러나 강렬하게 “우리는 기억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