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역사와 인물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 3·1운동 – 노구치 순사 처단 사건

나나77. 2025. 7. 7. 06:10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는 지금은 조용한 시골 장터로 인식되지만, 1919년 봄, 이 마을은 조선의 독립을 향한 거대한 함성으로 뒤덮였습니다.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의 물결은 빠르게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수원군 송산면(현 화성시 송산면)에서도 민족의 외침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이곳의 만세운동은 다른 지역과 달리 단순한 시위를 넘어서 일본 순사부장을 직접 처단하는 격렬한 항거로 이어졌습니다.
이 운동의 중심에는 당시 35세였던 사강리 출신의 홍면옥이 있었습니다. 그의 전력에는 도박과 횡령으로 인한 전과가 있었지만, 이것이 곧 그의 사상이나 민족의식을 폄하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진 않습니다. 오히려 당시 일제는 영향력 있는 독립운동가들에게 ‘파렴치범’이라는 오명을 씌워 명성을 실추시키려 했기 때문에, 홍면옥의 전과는 오히려 식민 권력의 탄압을 상징하는 반증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옛 송산면사무소 터
옛 송산면사무소 터(출처: 독립기념관)


송산면의 만세운동은 3월 26일부터 28일까지 사흘 동안 집중적으로 벌어졌으며, 면사무소, 뒷산, 사강 장터를 거쳐 수천 명이 참여한 대규모 저항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특히 일본인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가 격분한 군중에 의해 처단된 사건은 이 지역의 항일투쟁을 전국적 주목도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글은 홍면옥과 동지들이 이끈 송산면 3·1운동의 전개 과정과 일본 경찰과의 충돌, 그로 인한 처형 사건,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일제의 혹독한 탄압과 지금까지 이어지는 역사적 의미를 정리하고자 합니다.

 

준비된 외침, 사강리에서 시작된 민중의 봉기

1919년 3월 26일, 경기도 수원군 송산면 사강리에서는 예상치 못한 민중의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호세(戶稅)를 납부하는 날이었던 이날, 마을 주민 140여 명이 자연스럽게 구장 홍명선의 집에 모였습니다. 이 자리를 이용해 홍효선은 사람들에게 “다른 마을에서도 만세를 외치고 있으니, 우리도 함께 외치자”고 제안했고, 주민들은 이에 동의했습니다.
운동의 주동자였던 홍면옥은 주민들에게 “혹시 체포되더라도 주모자는 누구인지 발설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이는 그가 이전에 경찰에 체포된 경험을 바탕으로, 시위 이후 벌어질 상황까지 예측하고 대비했음을 보여줍니다.
이후 주민 약 150명은 송산면사무소 앞에 모여 태극기를 게양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면사무소는 일제 행정의 말단 조직이자 통치 상징이었기에 시위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순사보가 출동해 주동자를 추궁하자 홍효선은 “내가 주동자”라고 당당히 밝히며 체포를 자청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이튿날과 그 다음날에도 시위는 계속 이어졌고, 3월 28일 사강 장날을 이용해 수많은 외지인까지 시위에 동참하면서 운동은 지역 단위를 넘어선 민족 저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자발적 외침이 아니라, 명확한 계획과 동지 결속을 바탕으로 진행된 조직적 행동이었습니다.

 

총격과 피, 그리고 노구치 순사부장의 최후

3월 28일 오후, 송산면 사강리에는 또 하나의 역사가 기록되었습니다. 장날을 맞아 몰려든 군중과 마을 주민 1천여 명은 면사무소 뒷산에 모여 다시 한번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쳤습니다. 이때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가 군중을 해산시키려 하며 홍면옥, 홍효선, 예종리 등을 체포했습니다.
군중이 술렁이자 홍면옥은 체포된 상태에서 벌떡 일어나 다시 만세를 외쳤고, 이에 놀란 노구치는 총을 발사했습니다. 빗나간 총알이 홍면옥의 어깨에 맞았고, 그는 쓰러졌습니다. 이 장면은 수많은 사람의 분노를 일으켰고, 현장은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었습니다.
상처 입은 홍면옥은 장인 김명제와 동생 홍준옥의 도움으로 숙직실에서 응급처치를 받았고, 주민들에게 “일본 순사를 처단하라”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 사이, 서신면과 중송리에서 깃발과 태극기를 든 군중들이 몰려들었고, 시위는 점점 통제 불능 상태로 치달았습니다.
노구치는 상황이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자전거를 타고 남양군 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지만, 사강리 주재소에 잠시 들렀던 것이 화를 자초했습니다. 그를 뒤쫓던 수백 명의 시위대는 “빨간 모자를 쓴 자를 죽이라”고 외치며 추격했고, 도로에서 노구치를 돌과 곤봉으로 공격해 사망에 이르게 했습니다.
노구치의 피살은 3·1운동 전국 전개 과정 중 유일하게 고위 일본 경찰관이 현장에서 직접 처단된 사건으로, 전국적인 반향을 일으켰으며, 송산면의 항일운동을 역사적 전환점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보복과 고문, 사라진 이름 없는 영웅들

노구치의 죽음은 일제의 무자비한 보복을 불러왔습니다. 수원과 천안에서 급파된 헌병 4명이 송산면에 도착해 군중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했고, 이로 인해 33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 중 일부는 복부 관통상을 입는 등 중상을 입었습니다.
이후 시위 주도자와 관련자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가 진행되었고, 홍면옥, 김명제, 임팔룡, 홍준옥, 왕광연, 문상익, 차경현 등 수십 명이 구속되었습니다. 당시 주도적 역할을 한 홍효선, 이태순, 이윤식, 오경운, 예종구 등은 끝내 체포되지 않았습니다.  체포된 이들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문과 조사를 받았고, 대부분이 중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특히 1920년 5월, 홍면옥·홍준옥·문상익·왕광연은 징역 12년, 나머지 동지들은 6~7년의 중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들은 고등법원에 항소했지만, 1920년 7월 5일 모두 기각되어 그대로 복역해야 했습니다.

 

사강 장터에서 울린 만세의 기억, 오늘을 향한 유산

오늘날 송산면 사강리는 조용한 전통 시장으로 남아 있지만, 그 땅 곳곳에는 역사의 흔적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당시 첫 시위가 벌어졌던 송산면사무소 터는 현재 사강4리 경로당으로 바뀌었고, 뒷산에는 송산초등학교와 함께 삼일동산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3월 28일의 격렬했던 장터 시위는 현재도 사강시장 일대의 중심 공간에 흔적을 남기고 있고, 노구치 순사부장이 처단된 장소는 경기남부수협 사강지점 앞입니다. 그 인근에는 송산 3.1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홍면옥과 동지 42명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러한 장소들은 단순한 추모 공간이 아니라, 항일정신을 오늘의 교육과 시민의식으로 연결하는 소중한 유산입니다. 송산면의 3·1운동은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자발적 의지와 연대, 그리고 용기로 이뤄낸 진정한 민중운동이었습니다.
“빨간 모자를 쓴 자를 죽이라”고 외치던 그날의 함성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정의를 향한 민중의 응답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자유롭게 살아가는 이 땅 위에는, 바로 그날 송산의 외침이 뿌리처럼 내려앉아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