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영동군은 예부터 삼남(三南)의 교통 요충지로 꼽혀왔습니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잇는 삼도봉이 있는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는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활발했던 관문이었고,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들의 비밀 통로로 기능했습니다. 그 중심에 위치한 학산면 박계리는 조용한 농촌 마을처럼 보이지만, 그 땅 위에는 항일의 피와 눈물이 스며든 역사가 존재합니다.
1919년 3월,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3·1운동의 물결은 이 작은 마을에서도 뜨겁게 타올랐습니다. 특히 박계리에서 시작된 시위는 단순한 만세 외침을 넘어, 실제로 면사무소를 점거하고 일제의 식민 통치를 상징하던 시설들을 파괴하는 등 적극적이고 과감한 저항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시위의 상징적 장면 중 하나는 바로 ‘뽕나무 묘목 2만 7천 그루’를 불태운 사건입니다. 이는 일제의 경제 수탈 정책에 대한 민중의 분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학산면에는 ‘독립군 나무’라는 이름의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보호수처럼 보이지만, 이 나무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에게 중요한 신호탑 역할을 했습니다. 흰 천을 매달아 일본 경찰의 검문 유무를 알리던 이 느티나무는 지금도 조용히 역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영동군 학산면에서 벌어진 3·1운동의 전개 과정과 인천이씨 가문의 역할, 뽕나무 불태우기 사건의 상징성, 그리고 '독립군 나무'의 역사적 의미를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인천이씨 가문과 학산면 주민들의 항일 투쟁
1919년 3월 29일, 영동군 학산면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단순한 군중 시위가 아니었습니다. 인근 양산면 가곡리(일명 각골)에 세거 하던 인천이씨 가문의 어른들이 앞장서서 청년들에게 만세운동을 촉구했고, 이를 중심으로 지역사회가 하나의 항일 공동체로 뭉쳤습니다.
첫 시위는 서산리에서 도로공사에 강제로 동원된 인부들과 지역 주민 약 300명이 참여한 가운데 벌어졌습니다. 이들은 학산경찰주재소를 습격하여 건물 일부를 파괴하고 해산하였고, 다음 날에도 약 200명의 군중이 다시 모여 주재소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습니다. 경찰은 주동자 세 명을 체포했지만, 격분한 군중들이 주재소에 돌을 던지며 구속자를 석방하라고 외쳤고, 결국 일본 경찰은 구속자를 풀어주어야만 했습니다.
이후 영동경찰서에서 7명을 추가로 체포하고, 대전에서 일본군 응원대가 파견되며 일제는 강력한 진압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시위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가곡리의 청년 이광연은 체포된 동지를 구출하기 위해 면민들을 이끌고 학산면으로 향했고, 당시 도로공사에 동원된 인부들과 합세해 일본 경찰에게 저항했습니다.
체포된 이채연, 이광연, 이상찬, 이진국 등은 모두 인천이씨 후손으로, 향후 2년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들의 행동은 단순한 격분이 아닌 조직적인 계획과 용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 지역 항일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습니다.
불타는 뽕나무, 민중 분노의 상징
1919년 4월 3일, 학산면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은 단순한 외침을 넘는 격렬한 무력 행동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날 오후, 서산리 학산장터에서 약 50~60명의 주민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했고, 이내 군중 수는 300명으로 불어났습니다. 이들은 면사무소로 몰려가 면장 여규원에게 만세를 외치라고 요구했고, 면장이 이에 응하자 일단 해산했습니다. 하지만 진짜 거사는 그날 밤 시작되었습니다.
오후 7시경, 약 200명의 시위대가 다시 면사무소로 집결해 출입구와 건물 일부를 파손했습니다. 이 시위에서 주목할 인물은 양봉식이었습니다. 그는 “좁쌀도 살 수 없는 이 시국에 군에서 고가의 뽕나무 묘목을 강제로 나눠주는 것이 부당하다”고 외치며 민중의 분노를 이끌어냈습니다.
일제는 영동 지역에서 양잠 사업을 확대하며 뽕나무 묘목을 배포해 재배하게 했습니다. 이는 심을 땅이 한정적인 농민들에게 먹을 수 있는 작물을 심지 못하고 뽕나무 묘목을 심는 것은 부담이었고 강제적이었습니다. 이에 시위대는 면사무소 주변에 쌓아 놓은 2만 8천 그루의 묘목 중 2만 7천 그루를 정문 앞으로 옮겨 불태웠습니다.
불타는 뽕나무는 일제의 수탈 정책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 상징이 되었고, 이후 시위대는 학산경찰주재소로 이동해 또다시 건물을 공격했습니다. 이 시위로 인해 10명의 사상자와 22명의 체포자가 발생했고, 주도자 양봉식에게는 징역 5년, 나머지 인원들에게도 각각 징역 4개월에서 3년까지의 형이 선고되었습니다.
이날의 사건은 영동 지역 항일운동 중 가장 격렬한 저항으로 기록되며, 지역사회의 결집력과 민중 저항의 위력을 입증하는 결정적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박계리의 느티나무, ‘독립군 나무’가 된 이유
학산면 박계리 1366-1번지에 자리한 느티나무 한 그루는, 단순한 보호수를 넘어 역사적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독립군 나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나무는 수령이 400여 년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나무입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이 나무는 경성(서울)에서 남부지방으로 향하는 교통로 한가운데에 있었고,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 길을 지나며 남하하거나 연락망을 이어갔습니다. 일본 경찰은 이 점을 간파하고 이 길목에 자주 잠복하거나 검문소를 설치하였고, 체포와 구금 사례가 빈번했습니다.
이를 피하기 위해 독립운동가들은 ‘독립군 나무’에 흰 천을 매달아 일경의 유무를 멀리서 알아볼 수 있도록 하는 신호 체계를 만들어냈습니다. 이는 아주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으로, 수많은 투사들이 체포를 피하고 남부지방으로 무사히 이동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또한, 독립선언서를 서울에서 남부지방으로 전파할 때도 이 느티나무 아래가 중요한 중간 거점으로 활용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처럼 '독립군 나무'는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항일 통신망의 일환, 민중의 비밀 수호자 역할을 해냈던 것입니다.
현재 이 느티나무는 영동군 보호수 제4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역사적 가치에 대한 안내판이 설치되어 군에서 직접 관리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흔적이 점차 사라져가는 오늘날, 이 '독립군 나무'는 조용히 역사의 현장을 지키며 우리의 기억을 일깨웁니다.
영동의 기억, 나무와 사람으로 살아나다
영동군 학산면의 3·1운동은 이름 없는 민중과 지역 공동체가 함께 만든 위대한 저항의 역사였습니다.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났지만, 학산면처럼 뽕나무를 불태우고 주재소를 공격하며 실질적인 항일 행동으로까지 발전한 사례는 드뭅니다.
특히 인천이씨 가문을 중심으로 한 양산면과 학산면 주민들의 연대, 여성과 청년이 함께한 거사는 이 지역의 자긍심이자 대한민국 항일운동사의 중요한 유산입니다.
그리고 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독립군 나무’는 그저 나무가 아닙니다. 그 나무는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의 말을 듣고, 저항의 신호를 담았으며, 지금도 그 자리에 서서 “우리는 잊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뽕나무를 불태운 용기를, 그리고 느티나무에 천을 매달던 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의 자유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날의 함성과 불길, 그리고 나무 아래 작은 신호에서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동의 땅은 조용하지만, 그 속에서 피어난 항일의 정신은 지금도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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