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徐載弼, 1866~1951)은 조선의 유교 문신에서 시작하여 대한제국의 개혁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해방 이후의 행정 관료까지 전근대와 근현대를 모두 아우른 격동의 시대를 살아간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1866년 병인양요의 혼란 속에서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의 외가에서 태어났습니다. 본가는 충청남도 논산으로, 이후 대전 유성구 진잠현에 살던 재당숙 서광하의 양자로 입적됩니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두각을 드러낸 서재필은 1882년 별시 문과에 병과 3등으로 급제하며 17세의 나이에 관직에 나섰습니다.
젊은 서재필은 조선 후기의 개화사상에 매료되었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파 지도자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시대에 대한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그는 1883년 일본 도야마 육군학교에서 1년간 유학하면서 서양식 군사 교육을 받았으며, 1884년에는 김옥균이 주도한 갑신정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습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그는 결국 일본으로 망명한 뒤, 1885년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미국에서 그는 제2의 삶을 시작합니다. 서재필은 미국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조지워싱턴대학교 의과대학에서 병리학을 전공하여 한국인 최초의 서양의사가 되었습니다. 또한 미국 시민권을 획득한 그는 새로운 이름 ‘필립 제이슨(P. Jaisohn)’을 사용하며 미국 사회에서도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이처럼 그는 전통 유학자에서 개화 지식인, 그리고 서양 문명 수용자까지 다면적인 정체성을 갖춘 시대의 경계인이었습니다.
독립신문과 독립협회, 근대의 숨결을 심다
서재필은 갑오개혁이 한창이던 1895년 말, 박영효의 요청을 받아 귀국했습니다. 그는 귀국 직후 조선 사회에 필요한 것이 ‘민중 계몽’과 ‘자주독립의식’이라는 확신을 갖고 행동에 나섰습니다. 1896년 4월, 그는 조선 최초의 민간 영문·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했습니다. 『독립신문』은 국민 계몽, 독립 의식 고취, 정치 개혁 주장을 담은 매체로서, 한국 언론의 효시이자 근대적 언론 활동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같은 해 그는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시민 참여 정치와 외세 간섭 반대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독립협회는 서재필의 리더십 아래에서 민중 중심의 개혁과 토론, 자유의 가치를 확산시키는 운동으로 성장했습니다. 독립문 건립, 만민공동회 개최, 의회 설치 요구 등 당대의 개혁 운동은 근대 민주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신호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주도한 독립협회의 개혁은 당대 보수 권력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서재필은 정부의 탄압과 보수 세력의 반발 속에 1898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한국의 독립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멀리서 계속 헌신했습니다.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는 비록 단명했지만, 그가 남긴 사상과 활동은 한국 근대화 운동의 정점이었습니다.
해외 망명과 외교 투쟁, 독립운동가로서의 삶
서재필은 1919년 3·1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외교 고문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임시정부 산하의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 미국 워싱턴에서 한국의 독립을 위한 외교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습니다. 1921년 세계 군축회의에 참석한 그는 한국의 독립 요구서를 제출하였고, 이듬해에는 미국 대통령 워런 하딩을 면담하여 한국 문제에 대한 관심을 호소했습니다.
서재필은 1925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범태평양회의’에도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의 부당성을 고발했습니다. 그는 미국 의회와 언론, 국제기구를 대상으로 지속적으로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설명하였으며, 단순히 외교문서 작성에 그치지 않고 미국 정치권 인맥과의 연대를 통해 실제 영향력을 행사하려 노력했습니다.
그의 외교 활동은 ‘총칼 없는 독립운동’이었습니다. 서재필은 실질적인 무력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언론과 외교를 통해 조국의 존재와 독립의 열망을 세계에 알리는 데에 전 생애를 바쳤습니다. 그는 “조국을 위해 말하는 것 또한 하나의 투쟁”임을 보여준 언론인이자 외교전사였습니다. 이처럼 망명 후에도 조국의 독립을 위한 그의 사명감은 한순간도 식지 않았습니다.
해방 이후 1947년 귀국한 그는 미군정 최고정무관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후의 과도기를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정부 수립 후 정치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으며, 미국으로 돌아가 1951년 필라델피아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삶은 독립운동가이자 근대 지식인으로서 시대의 거울과도 같았습니다.
서재필의 유산, 기념공원과 생가에 깃든 독립의 정신
서재필의 생가는 그가 태어난 외가가 있는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생가는 한국전쟁 중 소실되었지만, 2003년에 복원되었고 지금은 ‘서재필 기념공원’과 함께 보성의 대표 독립운동 유적지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기념공원은 1992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하여 독립문(실물 크기), 서재필 동상, 송재사(사당), 서재필기념관 등 다양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서재필기념관에는 그의 유품 800여 점이 전시되어 있으며, 국내외 독립운동 활동 기록, 의학 활동 자료, 사진 등이 체계적으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특히 독립문 실물 재현은 독립협회 운동의 상징성과 교육적 의미를 함께 전달하는 상징적 구조물입니다.
그의 본가였던 논산 연무읍 금곡리 마을에도 '서재필 박사 본가지' 표석이 세워졌고, 해당 장소는 논산시 향토유적 제3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또한 그의 활동 근거지였던 미국 워싱턴 D.C.의 주미 한국 대사관 영사부 앞에는 2008년 서재필 동상이 건립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가 한국과 미국 양국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서재필은 한국 근대사의 서막을 연 사상가이자 실천가이며, 외교관이자 언론인이었습니다. 그가 남긴 정신은 ‘민중을 위한 개혁’, ‘국민 계몽’, ‘자주 독립’이라는 시대정신 그 자체였습니다. 전남 보성의 생가와 기념공원, 그리고 서울 독립문과 미국 워싱턴까지 이어지는 그의 흔적은 우리가 왜 그를 기억해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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