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한반도 곳곳에서 독립을 향한 거대한 함성이 들려오던 시기, 경상남도 합천에서도 불꽃같은 저항이 시작되었습니다. 서울의 독립선언이 시작된 지 보름이 지난 3월 18일, 합천 삼가면 삼가장터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만세시위가 발발한 것입니다.
합천 3·1운동은 단순히 외침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시위대는 일제의 경찰서와 면사무소를 공격하고 문서를 불태우는 등 무력에 가까운 강한 저항을 보였고, 이는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격렬한 양상을 띠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들고 귀향한 정현상과 이기복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시위를 조직하고 지역 유림, 학생들과 연계하여 장날을 기점으로 군중을 결집시켰습니다. 이 시위는 삼가장터를 시작으로 대양면, 대병면, 초계면, 가야면 등으로 번졌으며, 3월 23일에는 13,000명의 민중이 삼가에 집결하는 연합 시위로 절정을 맞이했습니다.
이 글은 경남 합천에서 벌어진 3·1운동의 배경과 전개, 군중의 용기, 그리고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유산과 정신을 조명합니다. 조용한 농촌이던 합천이 어떻게 독립의 불씨가 되어 거대한 항쟁의 무대로 바뀌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다시금 되새기는 일이기도 합니다.
정현상과 이기복의 귀향, 시위의 불씨가 되다
합천군 삼가면의 3·1운동은 철저한 계획과 민족의식 있는 인물들의 귀향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입수한 정현상은 고향으로 돌아와 형 정현하에게 이를 전하며 거사를 논의하였고, 이기복 역시 독립선언서를 구해 함께 시위를 준비했습니다.
이들은 1919년 3월 18일 삼가 장날을 기점으로 군중을 모아 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고, 이에 약 300~400명의 인원이 태극기를 들고 삼가시장을 누비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이 시위는 처음부터 격렬한 분위기였으며, 시위대는 일제의 통치를 상징하는 각종 관공서를 공격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삼가에서의 시위를 시작으로, 합천읍으로도 만세운동이 확산되었습니다. 강홍렬이 독립선언서를 들고 돌아와 읍내에 전달함으로써 3월 19일과 20일에는 대양면 주민들이 주도한 시위가 전개되었습니다. 이후 초계면, 대병면 등에서도 수천 명의 주민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으며, 지역 전역으로 만세운동이 빠르게 퍼졌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단순한 모방이 아닌, 민중 스스로 자발적인 참여와 지도자들의 사전 조직화에 의해 이뤄진 것이었습니다. 특히 시위의 일정이 장날과 연결되면서, 자연스럽게 군중이 모이게 되었고, 이는 대규모 시위의 실현 가능성을 높이는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삼가장터, 영남에서 가장 뜨거웠던 현장
합천 3·1운동의 정점은 3월 23일 삼가면 삼가장터에서 펼쳐진 연합 시위였습니다. 이 시위는 단순한 지역적 항쟁을 넘어, 인근 여러 면이 연합하여 조직적으로 진행한 대규모 민중 봉기였습니다.
삼가, 쌍백, 대병, 대양, 초계, 가회, 용주, 백산 등 합천 내 여러 지역과, 의령군 대의면, 산청군 생비량면 등지에서 약 13,000명의 시위대가 삼가장터에 집결했습니다. 이들은 일제의 관공서를 중심으로 행진하며 주재소, 면사무소를 공격하고, 통신선을 절단하고 문서를 불태우는 등 적극적인 저항을 펼쳤습니다.
당시 시위대는 “조선은 조선인의 것”이라는 구호와 함께, 국권 회복과 식민 통치 철폐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격렬한 시위는 일제 군경의 집중적인 탄압을 불러왔고, 현장에서 13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부상당하는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시위대는 해산하지 않고 여러 날에 걸쳐 장터와 면 소재지 등지에서 산발적인 만세운동을 이어갔습니다. 이는 일제의 체포와 고문에도 꺾이지 않는 저항의식이 합천 전 지역에 깊숙이 퍼져 있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삼가장터의 시위는 단순히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보아도 유례없는 면 단위 연합 시위, 조직적 폭력 저항, 대규모 희생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특징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유림과 학생, 다양한 계층이 함께한 저항
합천의 3·1운동은 지도자층과 평민층의 경계를 넘어 전 계층이 참여한 진정한 민중 항쟁이었습니다. 특히 이 지역에서는 유림(儒林)의 참여가 두드러졌는데, 이는 고종 인산에 참여했던 향촌 유생들이 서울에서 3·1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오며 독립선언서를 함께 가져온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3월 28일 야로면 시위, 4월 3일 가야면 매안리, 4월 7일 봉산면 술곡리에서의 만세운동은 이러한 전 계층 참여의 연장선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공재규, 윤성현, 오영근 등은 순국하거나 옥고를 치렀고, 이들의 이름은 후일 기념비와 지역사 속에 살아 숨 쉬게 되었습니다.
해인사에서도 학생들의 시위가 있었던 점은 불교계 인사들도 이 운동에 깊이 관여했음을 보여줍니다. 합천 3·1운동은 유림, 종교계, 학생, 농민, 상인 등 사회 각층이 함께했던 진정한 연합 저항이자, 지역 사회 전체가 독립운동의 주체였던 상징적 사건입니다.
기억 속의 함성, 기념비로 남은 자부심
오늘날 합천군 쌍백면 평구리 산 80-1 (쌍백초등학교 정문 앞)에는 ‘3·1운동 기념비(합천군)’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 비는 1919년 삼가장터에서 벌어진 뜨거운 외침과, 오영근, 윤성현, 공재규 등 순국 열사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것으로, 1995년 3월 1일 지역 사업가 정영섭 씨가 주도해 세운 것입니다.
기념비는 단순한 구조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역사적 사건을 후손들에게 전하고, 독립운동의 불꽃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 살아 있음을 상징하는 정신의 등불입니다.
삼가장터 인근에는 당시 시위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공간들이 존재하며, 매년 3월이면 기념식이 개최됩니다. 학생들과 주민들이 함께 모여 그날의 외침을 되새기고, 나라를 위한 헌신의 가치를 되새깁니다.
합천의 3·1운동은 단지 격렬함 때문만이 아니라, 조직력, 전계층 참여, 희생, 그리고 그에 걸맞은 기념사업까지 모두 갖춘 독립운동의 모범 사례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그 외침을 기억하고, 우리 삶 속에서 독립의 정신을 실천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합천의 민중이 외쳤던 “대한 독립 만세”는 지금도 살아 있고, 우리의 가슴속에서 다시 울려 퍼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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