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역사와 인물

강화에서 터진 독립의 함성 – 1만 명이 모인 3·1운동의 불꽃

나나77. 2025. 7. 9. 10:01

강화도는 우리 역사에서 반복되는 수난과 항쟁의 무대였습니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을 피해 도읍을 옮겼던 섬, 조선 왕실이 후금의 침공을 피해 몸을 숨겼던 은신처, 그리고 19세기에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운 최전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강화가, 또 한 번 조선의 미래를 위한 거대한 함성으로 뒤덮인 날이 있었습니다. 1919년 3월 18일, 무려 1만 명이 모인 대규모 만세운동이 바로 그 자리에서 펼쳐졌습니다.

강화 3·1독립운동 기념비
강화 3·1독립운동 기념비(출처: 현충시설정보서비스)


강화는 지리적으로 섬이었지만, 세상과 동떨어진 곳은 아니었습니다. 대한제국의 군인 출신 유봉진, 연희전문학교 학생 황도문, 그리고 강화공립보통학교 학생들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교회, 학교, 시장 등지에서 힘을 모아 조직적으로 시위를 준비했습니다.
그 시위는 기독교, 교육, 지방 자치 지도자들이 결합한 전 계층적 민중 봉기였으며, 경성(서울)에서 시작된 독립의 불씨가 전국으로 퍼지던 바로 그 흐름의 결정체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강화군 3·1운동의 준비와 전개, 산상 봉화 시위, 그리고 현재 기념유산까지 그 역사를 조명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의 진정한 민중 항쟁은 섬에서도 결코 멈춘 적이 없었습니다.

 

선언서와 격문, 준비된 시위는 어떻게 시작됐는가

강화 3·1운동의 시작은 1919년 3월 13일, 강화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동맹휴학이었습니다. 경성에서 귀향한 고등학생의 자극으로 시작된 이 행동은 일제 통치에 대한 공개적 거부였고, 동시에 지역 사회에 만세운동의 불씨를 지핀 계기였습니다.
그 중심에는 길상면 온수리 출신의 유봉진이 있었습니다. 그는 대한제국 군인이자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황도문을 통해 경성의 3·1운동 소식을 접했습니다. 이후 선두리 교회와 길직리 교회, 포목행상인 염성오, 목사 이진형, 전도사 조종렬 등 기독교 네트워크를 활용해 조직적으로 시위를 계획했습니다.
3월 8일에는 길직리 교회에서 시위 날짜와 장소를 3월 18일 강화읍 장날로 정하고,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작성하여 배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문서들은 황유부의 집에서 인쇄되었고, 염성오의 여동생은 포목 행상을 하며 이를 강화 곳곳에 전달했습니다.
특히 3월 16일의 회의에서는 시위 주도 인물들이 주문도에 있어 부재중이라는 이유로 시위 연기를 검토했지만, 황윤실이 “이미 군민들에게 약속했으니 혼자라도 만세를 외치겠다”고 주장하며 시위를 강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3월 17일 마지막 준비 회의에서는 각자 태극기를 준비하여 장날에 일제히 흔들자는 전략이 확정되었고, 18일의 시위를 향한 준비는 끝이 났습니다.

 

장터가 들끓다 – 강화읍에 모인 1만 명의 외침

1919년 3월 18일 오후 2시, 강화읍 장터에는 수천 명의 군중이 모였습니다. ‘조선독립’이라 적힌 깃발과 구한국의 태극기가 장터를 가득 메웠고, 군중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군청 방향으로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시위 선두에는 말을 탄 유봉진이 있었습니다. 그는 ‘결사대 유봉진’이라 적힌 태극기를 휘날리며 군중을 인도했고, 군청 상점 앞의 큰 종을 울려 시위 시작을 알렸습니다.
군중은 군청, 객사, 공자묘를 따라 행진했고, 군청 앞에서는 군수 이봉종에게 직접 “만세를 외치라”는 요구를 했습니다. 만약 응하지 않으면 군청에 난입하겠다는 위협까지 더해졌습니다. 결국 군수는 정원에 나와 만세를 외쳤습니다.
이날의 시위는 단순한 외침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경찰에 체포된 유희철 등의 석방 요구가 이어졌고, 오후 5시경 1만 명이 넘는 군중이 경찰서를 포위했습니다. 군중은 “석방하지 않으면 경찰서를 파괴하겠다”고 외쳤고, 경찰은 위급함을 느껴 체포자를 전원 석방했습니다.
시위는 해산되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유봉진은 다시 군중 앞에서 연설하며 “내일 온수리에서 다시 만세를 부르자”고 제안했고, 군중은 박수로 응답했습니다.
이 시위는 하루로 끝난 항거가 아니었습니다. 이틀 뒤인 3월 21일부터 26일까지 화개면, 교동면, 석모도 등으로 시위가 확산되었고, 군 전체가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봉화가 이어지다 – 섬과 산을 넘어 퍼진 독립의 불꽃

강화는 본섬만 아니라 교동도, 석모도 등 수많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은 시위 확산의 걸림돌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봉화 시위라는 방식으로 지역 간 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19년 4월 1일부터 강화 곳곳의 산에서 횃불이 타올랐습니다. 송해면 당산리의 풍류산, 양사면 철산리, 하점면 양오리 등에서는 약 100여 명의 주민이 모여 산상 봉화 시위를 벌였습니다.
4월 7일에는 삼산면 석모리 당산, 8일에는 선원면 냉정리, 양도면 삼흥리와 석포리, 9~10일에는 불은면 고능리 덕정산 등지에서 연속적인 봉화 시위가 이루어졌습니다.
봉화 시위는 단순한 신호가 아니었습니다. 섬과 섬 사이의 주민들이 횃불을 통해 “우리도 싸우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며 심리적 유대감을 형성했던 전략이었습니다.
이러한 시위는 일본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야간에 진행되었고, 주민들 스스로 횃불과 태극기를 준비하여 산에 올라가 만세를 외쳤습니다. 이는 강화군 전체가 독립운동의 주체로 나섰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강화의 3·1운동은 도시나 육지에 국한된 것이 아닌, 바다를 사이에 둔 섬까지 아우른 전국적 저항의 축소판이었습니다.

 

강화, 항쟁의 땅에서 이어지는 기억과 정신

강화읍사무소 앞, 강화대로 440번길 10번지. 지금은 평범한 관공서처럼 보이지만, 바로 이 자리가 1919년 3월 18일 1만여 명의 군중이 대한독립을 외쳤던 시위의 중심지입니다.
이곳에는 ‘강화 3·1운동 시위지’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으며, 불과 수십 미터 떨어진 용흥궁공원에는 강화 3·1독립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기념비는 원래 1994년 강화읍 견자산에 세워졌고, 이후 강화읍 웃장터로 이전되었다가 2011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습니다. 그 뒤편에 자리한 용흥궁은 조선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거주하던 잠저로, 이 공간 자체가 역사와 정통성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강화의 3·1운동은 서울의 뒤를 이은 조직적 저항이었으며, 교회와 학교, 시장과 산봉우리가 모두 시위의 무대가 되었던 전국적 저항의 축소판이었습니다.
지금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가 할 일은, 그 외침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단지 하루만 외친 것이 아니라, 수십 일이 이어졌고, 수천 명이 동참했으며, 민중이 스스로 주도했던 항쟁입니다.
강화도의 하늘 아래 지금도 그날의 함성이 메아리처럼 울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그 함성을 기억하며, 역사의 주체로서 살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