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울려 퍼진 독립선언은 곧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나 강원도 울진군(현, 경상북도 울진군)은 사정이 달랐습니다. 이 지역은 당시 서울과의 거리도 멀었고, 험준한 태백산맥 너머 동해안에 위치해 있어 교통과 연락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다른 지역보다 한 달 이상 늦은 4월 11일에서야 매화장터에서 첫 만세시위가 일어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진의 3·1운동은 소극적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만흥학교를 중심으로 한 청년들, 기독교 감리교회의 인사들, 마을 장정들과 장날을 찾은 일반 군중들까지 힘을 모아 3일에 걸쳐 시위를 이어갔습니다. 이들은 태극기를 게양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으며, 일제 헌병의 총탄에 맞서 싸우는 등 강한 저항을 펼쳤습니다.
당시 울진은 강원도 소속이었으며, 울진군 근남면의 장식이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가 이 모든 시위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이후 윤병관, 윤강규, 최현탁, 전병겸 등 지역의 청년 지도자들이 의기투합하여 매화장터를 중심으로 민중항쟁을 이끌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1919년 울진군 매화장터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의 전개 과정과 중심인물들, 군중들의 투쟁, 그리고 이후 기념유산에 대해 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선언서 한 장이 가져온 시위의 불씨 – 매화장터의 시위 준비
울진지역의 3·1운동은 장식이라는 인물이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들고 돌아오면서 본격적으로 점화되었습니다. 그는 이 선언서를 친구 윤병관에게 건네주었고, 윤병관은 감리교 전도사인 전병겸, 고성리의 주진휴 등과 연락하며 만세운동을 계획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매화리와 금매리에 거주하던 만흥학교 출신의 청년 윤강규, 최현탁, 최중모 등과 힘을 합쳤습니다. 특히 전병겸은 자신의 외조부인 서울 감리교회 전도사 홍규익을 통해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았고, 이를 토대로 시위 전략을 구체화하였습니다.
1919년 4월 10일 밤, 윤강규, 장형관, 전병겸, 최효대 등 8명의 청년은 남수산 꼭대기에 올라가 태극기를 게양하며 독립운동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습니다. 이 행위는 일본 경찰에 곧바로 발각되어 윤상흥 등 5명이 체포되었지만, 그들의 결의를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날 밤의 태극기 게양은 단순한 퍼포먼스가 아니라, 군중을 결집시키고 다음 날 시위를 알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실제로 4월 11일 매화 장날, 이들의 시위는 계획대로 실행되었고, 지역민들의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총성과 저항, 군중의 외침이 울린 매화장터
1919년 4월 11일 오후 3시, 매화장터는 평소처럼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이날의 장날은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시위의 선봉에 선 최효대가 큰 소리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태극기를 흔들었다. 장터에 있던 군중도 일제히 외침에 동참하였고, 곧 100여 명이 넘는 인파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메웠습니다.
이에 당황한 일제 헌병대는 무장한 병력을 급파하여 총을 쏘며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하였고, 이 과정에서 윤상흥 외 5명을 포함한 11명이 체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체포는 시위의 동력을 꺾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이튿날인 4월 13일에는 북면 부구리 장터에서 또 다른 시위가 전개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남병표와 전병항 등이 주도했고, 김광수, 김도산, 김봉문, 황영백 등 지역 인사들이 합류했습니다. 약 500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들고 장터를 행진했고, 이들은 장날을 맞아 모여든 군중 속에서 다시금 독립 의지를 불태웠습니다.
그날 밤에도 군중은 흩어지지 않고 다시 모였습니다. 이들은 체포된 동지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밤늦게까지 만세를 외쳤습니다. 헌병대는 총격을 가하며 해산을 시도했지만, 군중은 굴하지 않고 헌병들과 육박전을 벌였습니다. 김광수는 헌병보조의 총을 빼앗기 위해 몸싸움을 벌였고, 주상철의 총을 막아내며 용기를 보여주었습니다. 결국 밤하늘에 총성이 울렸고, 시위는 강제 해산되었지만 군중의 저항 의지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어지는 저항과 보복 – 체포, 재판, 그리고 옥고
매화장터와 부구리 장터에서의 시위는 그 후에도 파장을 이어갔습니다. 4월 14일 평해면, 15일 온정면에서도 시위가 벌어졌고, 지역 산마다 태극기가 내걸리는 등 독립운동의 열기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일제는 급기야 헌병대뿐만 아니라 수비대, 재향군인까지 동원하여 태극기를 압수하고 주민을 감시하며 대응에 나섰습니다. 군중들은 물러서지 않고 밤에도 시위를 감행했고, 태극기는 울진 전역의 산과 들에 펄럭였습니다.
하지만 조직적인 탄압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시위를 주도했던 인물 11명이 체포되었고, 법원에서는 이들에게 징역 4개월에서 6월에 이르는 실형이 선고되었습니다. 윤상흥은 특별히 태형 90대라는 혹독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재판 기록은 단순히 벌의 차원을 넘어, 일제가 이 지역 독립운동의 확산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당시 만흥학교는 폐교 조치를 당했으며, 감리교 전도사들에 대한 감시와 탄압도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사라진 장터, 그러나 살아있는 독립의 기억
오늘날 매화장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옛 장터 자리는 주택지로 변했고, 시위의 함성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듯 보입니다. 그러나 울진군 원남면 매화리 산 364번지에는 지금도 그날을 기리는 ‘울진 기미독립만세기념탑’이 우뚝 서 있습니다.
이 기념탑은 동해안의 외진 마을에서도 조국을 위해 태극기를 들었던 이들의 정신이, 여전히 이 땅에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역사적 상징입니다. 태백산맥 너머, 조선의 변방이었던 울진. 그곳에서 시작된 외침은 거칠고 느렸지만, 그만큼 뜨거웠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이름 모를 청년들이 산꼭대기에 태극기를 세우던 그날, 장터 한복판에서 총소리와 함께 터져 나온 ‘대한 독립 만세’의 울림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뿌리이며, 다시금 되새겨야 할 정신입니다.
울진 매화장터의 외침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역사는 계속되고 있으며, 그 정신은 오늘의 우리 안에서 다시 깨어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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