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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를 울린 여학생들의 함성 – 정명여학교 4.8만세운동의 기억

전라남도 목포시 양동에 자리한 정명여학교는 지금은 평범한 여자중고등학교로 알려져 있지만, 100여 년 전 그 교정은 뜨거운 함성으로 뒤덮인 항일운동의 중심지였습니다.1919년 4월 8일, 목포의 4.8만세운동은 이 학교의 교사와 여학생들에 의해 촉발되었습니다.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선언은 전국으로 퍼졌고, 목포 역시 독립의 열망으로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목포의 항일운동은 정명여학교와 영흥학교 학생들 양동교회 신도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특히 정명여학교의 여학생들이 주축이 되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의를 지닙니다.그들은 태극기를 손으로 제작하고, 독립선언서를 숨겨 날랐으며, 시내를 누비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일제의 감시 속에서도 무너짐 없이 거사를 준비했고, 그날 목포는 이들의 외침..

포항 덕성장터에서 울려 퍼진 만세의 함성 – 1919년 3월 22일, 대전리 사람들의 항일투쟁

경상북도 포항시 청하면의 덕성장터는 현재는 평범한 상가 건물들이 줄지어 있는 도심 일각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100여 년 전, 이곳은 경상북도 일대에서 가장 격렬한 3·1운동이 벌어진 역사의 현장이었습니다. 덕성장터는 1919년 3월 22일, 독립을 향한 외침으로 가득 찼습니다. 바로 그날, 송라면 대전리 출신의 기독교인들이 조직한 만세운동이 이곳에서 폭발하듯 일어났던 것입니다.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은 빠르게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경북 포항 지역 역시 그 흐름에 동참했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의 운동은 단순한 동조 시위가 아니었습니다. 덕성장터 만세운동은 철저한 준비와 공동체의 신앙, 조직력이 어우러진 지역 중심의 독립운동이었습니다. 주도세력은 대전리 대전교회 출신의 기독교 신자들이었고, 이들은 거사 ..

공주에서 피어난 독립의 불꽃, 영명학교 3·1운동의 진실

충청남도 공주에는 조용히 그 자리를 지켜온, 오래된 학교가 있습니다. 바로 ‘영명학교’입니다. 언뜻 보면 평범한 기독교계 사학이지만, 그 교정은 1919년 4월 1일, 공주 지역에서 울려 퍼진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출발한 곳이었습니다.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의 열기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공주 역시 그 대열에 빠지지 않았습니다.공주에서의 만세운동의 그 중심에는 영명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비밀리에 회합을 열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며 조직적인 운동을 준비했습니다. 영명학교는 단순한 교육기관을 넘어 항일운동의 중심지로, 당시 충청도 지역의 청년 독립운동가들이 집결한 공간이었습니다. 지금은 당시의 교사나 기숙사는 사라지고 터만 남았지만, 그 의미는 결코 희미해지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공주 ..

만세로를 걷다 – 동두천에서 울려 퍼진 독립의 외침

누구나 한 번쯤 지나치는 동두천의 평화로. 평범한 도심의 풍경 속에서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는 이 길에, 2023년부터는 특별한 이름이 붙었습니다. 그 이름은 바로 ‘3.1.만세로’. 이 명예도로는 단순한 도로명이 아닙니다. 이는 104년 전, 이 땅의 주민들이 한 목소리로 외쳤던 “대한독립만세”의 울림이 고스란히 새겨진 상징입니다. 지금 우리가 걷는 이 거리 한복판에서, 누군가는 태극기를 들고 목숨을 걸고 만세를 외쳤습니다.동두천에서 일어난 이 운동은, 서울의 물결이 지역으로 흘러들어가며 하나의 ‘현장’으로 완성된 민족 저항의 실체였습니다. 도로 하나에 담긴 정신은 한 지역의 기억을 넘어, 전국적인 독립운동의 한 조각을 복원하는 데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동두천 3·1운동의 발생 배경, 준비 과정, 역..

활명수의 탄생지,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다 – 종로 동화약방과 서울 연통부의 역사

1897년 한성부 서소문 차동, 지금의 서울 순화동에는 단순한 약국이 아닌 한국 제약사와 독립운동사의 결정적 장소가 하나 생겨났습니다. 이곳은 바로 동화약방이었습니다. 이 약방은 단순히 소화제를 제조·판매하던 민간 상점이 아니었습니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약 ‘활명수(活命水)’를 개발한 민병호에 의해 설립된 민족기업이었고, 3·1운동 이후에는 상하이임시정부의 서울 연통부(聯通府)로 기능하며 비밀 연락망과 독립운동 자금의 중계 거점이 되었습니다. 동화약방의 대표 상품 활명수는 단순한 소화제가 아니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물’이라는 이름처럼, 당시 급성 위장질환으로 사망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시절, 활명수는 말 그대로 죽음을 막아주는 기적의 약수로 불렸습니다. 민병호는 한의학 지식과 궁중의 비방, 그리..

부산 백산상회, 무역을 가장한 항일거점 – 부산에서 피어난 안희제의 독립혼

1914년 부산 동광동 한복판에 문을 연 ‘백산상회(白山商會)’는 겉보기엔 곡물과 해산물을 거래하는 평범한 민간 상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조용히, 그러나 뜨겁게 조국의 독립을 도모하던 이들의 은밀한 전진기지였습니다. 백산상회를 설립한 이는 경상남도 의령 출신의 민족 자본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안희제(安熙濟)였습니다. 그는 단순한 사업가가 아니었습니다. 국권 회복의 염원을 가슴에 품고, 상업이라는 외피를 입힌 ‘독립운동 네트워크’를 현실화한 전략가였습니다. 이 상회는 상하이임시정부와 연결된 독립운동 자금 송출 창구이자,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의 연락 기지로 기능했습니다. 겉으론 무역과 유통을 위한 상업 활동을 펼쳤지만, 실제로는 고향 땅에서 팔아 마련한 자본과 지지 세력을 동원해 독립운동의 생명줄을 이어갔습..

물질보다 강한 외침 – 1932년 제주 해녀들의 항일 봉기, 생존을 넘어 민족의 이름으로

1932년 겨울, 바닷속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제주 잠녀(潛女, 일반적으로 ‘해녀(海女)’라고도 합니다. 이후 글에선 해녀라 칭하겠습니다.)들은 자신들의 호흡보다 더 큰 소리를 세상에 내기 시작했습니다. 삶의 터전인 바다에서 물질로 생계를 이어가던 그들에게,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억압이 다가왔습니다. 그 억압은 단순히 저임금이나 부당한 계약 형태가 아니라, 식민지 체제 아래서 일제 당국과 일본 상인, 어용 잠녀조합이 함께 결탁하여 해녀들을 수탈하는 구조 그 자체였습니다. 해녀들은 자신들의 물질 노동이 단순한 경제활동이 아니라 생존의 권리,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자존을 지키기 위한 항거로 이어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제주 해녀들은 오래전부터 제주 해양 문화의 핵심을 이루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1930..

진남관에서 피어난 저항의 불꽃 – 여수공립보통학교 학생운동의 발자취

전라남도 여수는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의 전승 신화가 깃든 군사 요충지이자, 동시에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의 숨은 중심지였습니다. 특히 여수공립보통학교는 충무공 이순신이 머물렀던 유서 깊은 건축물 ‘진남관(鎭南館)’을 교사로 사용하며, 그 공간에서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근대 교육과 항일 운동이 함께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상징성을 가집니다. 이 학교는 1908년 사립 경명학교로 출발해 1911년 공립보통학교로 전환되었고, 1935년까지 진남관을 교사로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여수공립보통학교는 일제의 식민교육에 맞선 학생들의 자주적 저항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특히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까지 이 학교에서는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의 민족차별적 행위에 항의하는 동맹휴교, 항일 격문 배..

폭탄으로 저항한 청년들 – 부민관 투탄 의거와 서울 중구의 항일 역사

1945년 7월 24일, 서울 중구 태평로 한복판에서는 일제 말기 조선에서 벌어진 항일투쟁 가운데 가장 극적인 사건 중 하나가 일어났습니다. 조선총독부가 주도하는 친일 선전대회, '아세아민족분격대회'가 열린 경성부민관에서 폭탄이 터졌던 것입니다. 당시 부민관은 일본 제국주의를 미화하고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던 중심 무대였고, 이곳에 투하된 폭탄은 단순한 물리적 파괴가 아니라, 조선 청년들의 마지막 저항, 끝까지 꺾이지 않은 항일의지를 상징하는 선언이었습니다.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 세 청년은 일제의 패망이 임박한 시점에서도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폭파 작전을 통해, 1급 친일파 박춘금의 선전장을 무력화하며 역사에 길이 남을 '부민관 투탄 의거'를 일으켰습니다. 이 의거는 단순한 테러가 아니라, 식민지 청년들의..

양양에 울려 퍼진 6일간의 함성 – 강원도 최대 규모 3·1운동의 기록

1919년 전국을 뒤흔든 3·1운동은 강원도에서도 크고 작은 형태로 확산되었지만, 그중에서도 양양군에서 벌어진 3·1운동은 규모와 열기 면에서 타 지역과 비교해 손색이 없을 정도로 치열하고도 조직적인 항쟁이었습니다. 양양에서의 만세시위는 단순한 일회성 시위에 그치지 않고, 6일 동안 8회에 걸쳐 전개된 대규모 민중 저항 운동이었습니다. 연인원 1만 5천여 명이 참가한 이 운동은 양양 전역 6개 면, 82개 마을에 걸쳐 확산되었으며, 지역 주민의 강력한 항일 의지와 민족 독립에 대한 열망이 어떠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1919년 4월 3일부터 시작된 이 시위는 4월 9일까지 매일같이 이어졌으며, 특히 마지막 날 벌어진 현북면 기사문리 ‘관 고개’ 시위는 6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일제의 무차별 발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