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을 찾는 많은 여행객들은 동래읍성을 단순한 역사 유적으로 인식합니다. 돌로 쌓은 웅장한 성곽과 축제의 무대로 활용되는 이 공간은 겉으로는 평온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곳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일제강점기 시절 항일의 불씨가 일찍부터 타오르기 시작했던 부산 항일운동의 상징적 장소입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부산 동래 지역은 경남권에서 가장 빠르게 움직인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특히 동래읍성 주변은 부산 시민들이 직접 거리로 나서 만세를 외쳤던 현장이며, 학교, 기독교계, 불교계, 시장이 조직적으로 연대한 독립만세운동의 핵심지였습니다.
그 당시 부산은 조선 내에서도 가장 빠르게 서구 문물이 유입되던 항구도시였고, 이러한 열린 환경은 시민들의 의식 수준을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 결과 동래읍성은 단지 옛 조선의 유물이 아니라, 일제에 맞서 싸운 부산 민중의 의지와 희생이 녹아든 항일운동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동래읍성의 독립운동사, 그리고 그날의 진실을 생생하게 되짚어보려 합니다.
1919년 3월 11일, 동래읍성을 울린 대한독립 만세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난 지 열흘이 채 지나지 않은 3월 11일, 부산 동래읍성에서는 수백 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대한독립을 외치며 거리로 나섰습니다. 일신여학교, 동래고보의 만세 시위가 잇따라 일어났습니다. 또 3월 18일과 19일에는 범어사 명정학교와 지방학림 학생들이 주도한 동래 장날 만세 시위가 대규모로 일어났습니다.
일신여학교 학생들은 태극기 100여 장을 만들어 만세시위를 진행했습니다. 이후 3월 13일에는 동래고등보통학교(현재의 동래고)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선언문을 복사하고,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며 동참을 유도했습니다. 당시 동래 지역에는 일본 경찰서와 헌병대가 밀집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공포를 무릅쓰고 동래읍성 앞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이들은 종을 울리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고, 일본 헌병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중에게 무차별 곤봉과 총검을 사용했습니다.
그날 부산 지역에서만 최소 100여 명 이상이 체포되었으며, 이 중 상당수는 고문과 폭행을 당한 뒤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하지만 일신여학교 학생들의 시위를 시작으로 부산 시민의 항일 의지를 더욱 자극했고, 이후에도 범어사 명정학교와 지방학림 학생들이 주도한 만세 시위 등이 일어나며 부산·경남지역의 항일운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동래읍성에서 울린 외침은 단지 한 도시의 소란이 아니라, 일제의 탄압에 맞선 민중 의식의 분출이었으며, 이후 부산이 항일운동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만든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동래읍성 주변의 인물들과 항일조직의 숨은 이야기
동래읍성 만세운동이 조직적이었던 이유는, 단지 우연히 모인 시민들이 아니라 사전 준비를 진행한 지역 조직과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범산 김법린은 한용운에게 독립선언서를 받아 동래장터에서 시민들과 만세운동을 주도했습니다.
또한 부산진교회는 항일운동의 중심지 중 하나로, 많은 기독교인 청년들이 교회를 통해 독립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교회는 단지 신앙의 공간을 넘어, 항일사상의 전달 통로이자 지하 모임의 은신처 역할을 했습니다.
이외에도 박재혁 열사는 부산 출신으로, 1920년대 초 일본 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의열단 출신입니다. 그는 동래읍성의 만세운동 이후 항일 무장투쟁에 뛰어들게 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동래읍성과 그의 직접적인 관계는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같은 지역 출신 청년들이 독립운동의 다양한 형태로 분화되던 당시의 분위기를 잘 보여줍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당시 부산의 여성들 역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는 사실입니다. 부산 3·1운동의 시작이 일신여학교 학생과 교사들이었고, 그 외 많은 여성들은 남성들과 함께 거리로 나와 만세를 외쳤고, 체포되어 형을 선고받은 사례도 있습니다. 이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기록에서 얼마나 많이 누락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며, 현재 부산시에서는 이들의 이름을 되찾기 위한 기록 복원 사업도 진행 중입니다.
동래읍성을 중심으로 벌어진 이러한 다양한 저항의 기록은, 당시 항일운동이 단지 지도자 몇 명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민중 전체가 하나의 목표로 움직였다는 사실을 입증해 줍니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동래읍성과 그 의미
오늘날 동래읍성은 시민들이 가볍게 산책하는 문화공원으로 탈바꿈되었습니다. 고운 석축과 전통적인 기와 건물들이 복원되어 있으며, 지역 축제와 문화행사의 배경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분명히 항일운동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부산시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동래읍성 내 ‘항일운동 기념비’를 설치하고, 관련 인물의 이름을 새긴 부조를 제작했습니다. 인근 학교들은 학생들에게 동래읍성 만세운동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고 있으며, 지역 시민단체들도 매년 3월 11일을 기념하는 재현 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 공간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지나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역사교육이 단순히 교과서 속 연도 외우기에서 벗어나,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동래읍성은 살아 있는 교육의 현장입니다.
우리가 이곳을 산책할 때, 단지 성벽의 높이나 축성 기법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외쳤던 수많은 이름 없는 시민들의 용기를 기억해야 합니다. 독립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지역 곳곳에서 일어난 작은 외침들이 모여 만들어진 결과입니다. 동래읍성은 그 외침의 첫 울림이 시작된 장소 중 하나이며,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권리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유산입니다. 이제 그곳을 다시 걸을 때, 우리는 단지 관광객이 아니라, 역사의 증인으로서 그 땅을 바라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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