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은 조선의 근대사를 상징하는 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1883년 개항과 함께 외세의 문물이 가장 먼저 유입된 이 도시는, 일제 식민지배가 가장 먼저 실험된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인천항을 통해 물자와 인력이 이동했고, 일본인 조계지와 차이나타운이 함께 공존했던 복합적인 구조는 인천만의 독특한 도시 풍경을 형성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성’의 이면에는 시민의식과 민족정신으로 무장한 지역 주민들의 항일운동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많은 이들은 서울과 평양, 의열단이나 광복군의 활동에만 주목하지만, 인천에서 일어난 3·1운동, 학교 중심의 학생운동, 종교단체의 저항, 노동자들의 파업 등은 전국 항일운동의 흐름과 결을 같이하며 지역적 특성을 지닌 독립운동의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특히 인천은 교통과 정보의 중심지로서 독립운동의 확산과 조직화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고, 실제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인천을 거점으로 활동하다가 투옥된 바 있습니다.
인천의 항일운동은 일회성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개항 이후부터 광복까지 이어진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민족운동의 흐름이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중에서도 특히 지역 주민들이 주체가 되어 전개한 인천의 항일운동의 역사를 조명하고자 합니다. 학교, 종교, 노동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이어진 저항의 역사를 통해, 지금 우리가 인천을 다시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1919년 3·1운동과 인천 시민의 거대한 외침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불과 며칠 만에 인천으로 번져 나왔습니다. 3월 6일, 인천에서는 학생과 상인, 종교인, 일반 시민들이 참여한 대규모 만세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중심 장소는 신포동 일대였습니다. 인천의 만세운동은 지역 학교를 중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인천공립보통학교, 인천상업학교 등에서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준비했습니다. 이들 학생들 중 일부는 체포되어 감옥에 투옥당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인천 내리교회 등 기독교인들은 항일 민족의식 고취와 독립운동 자금 모금에도 적극 참여했습니다. 이러한 종교 기반의 운동은 단순히 시위에 그치지 않고, 이후 지역 주민의 결속과 지속적인 저항 정신을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3월 6일 만세운동 당시, 수백 명의 인파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인천 시내를 행진했고, 일본 헌병대는 총칼로 이를 무력 진압했습니다. 하지만 인천 시민들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항거는 인천만의 특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개항장으로서 외국인 거주자가 많았고, 일본의 식민통치가 매우 강하게 작용한 만큼, 시민들의 반발심도 컸습니다. 또한 철도와 항만이 집중된 지리적 특성은 시위가 빠르게 확산되고, 다양한 계층이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1919년의 이 외침은 인천 항일운동의 상징이 되었으며, 이후 더욱 조직적이고 다양한 형태로 확대되어 갔습니다.
학교·종교·노동… 다층적인 인천 항일운동의 양상
3·1운동 이후 인천에서는 더욱 체계적인 항일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학교와 종교, 노동조합 등의 조직이 있었습니다. 당시 인천공립보통학교, 인천공립상업학교 등은 일제 감시의 중심에 있었지만, 학생들은 ‘자유’와 ‘독립’이라는 가치를 학습하며 자연스럽게 민족의식을 함양하고 있었습니다.
종교계에서도 항일운동은 이어졌습니다. 내리교회 등은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거나, 지하조직 활동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참여했습니다. 이들 종교기관은 단순한 신앙 공동체를 넘어, 민족주의자들이 모여 소통할 수 있는 문화 공간이자, 민중교육의 장이었습니다.
노동자 계층의 참여도 주목할 만합니다.
인천은 항만 노동자, 철도 노동자, 조선소 노동자 등 당시 조선 산업의 핵심 현장이 몰려 있는 도시였으며, 자연스럽게 항일 노동운동도 활발했습니다. 일부 조합은 일본인 관리자들의 차별과 저임금에 저항하여 동맹파업, 태업, 노동조합 결성 등으로 대응했고, 이는 경제적 저항을 넘어 정치적 독립운동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오늘의 인천, 그 역사 위에 서 있는 도시
2025년 오늘날 인천을 걷는 이들에게, 항일운동의 흔적은 그리 쉽게 눈에 띄지 않습니다. 신포동, 답동, 숭의동, 내동 등은 이제는 카페와 빌딩이 들어선 상업지구가 되었고, 수많은 역사적 현장은 철거나 개발로 인해 사라졌거나 잊혀졌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 곳곳에는 여전히 독립운동의 흔적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답동성당, 내리교회, 인천역, 제물포항 일대는 모두 인천 항일운동의 유산을 간직한 공간입니다. 최근에는 인천시와 문화재청, 시민단체가 힘을 모아 이러한 장소를 ‘근대문화유산’과 ‘항일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보존하려는 노력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일부 교회는 관련 전시관을 설치하고, 학교에는 항일운동 참여 학생들의 사진과 자료를 남겨 후손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항일운동길 걷기 프로그램’, ‘독립운동가 후손 초청 강연’, ‘지역 독립운동사 발굴 프로젝트’ 등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활동은 인천이 단순히 근대화의 상징 도시가 아닌, 식민지배에 맞서 싸운 저항의 도시였음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인천이 저항의 역사를 기억하고, 그것을 미래세대와 공유할 수 있는 도시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항일운동은 과거의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이 도시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주와 정의, 평등과 연대라는 가치를 끊임없이 되물으며 살아 있는 역사로 남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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