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역사와 인물

당진 대호지와 천의장터, 일제의 중심을 뒤흔든 4·4 만세운동

나나77. 2025. 6. 30. 00:00

1919년 대한민국 전역을 뒤흔든 3·1 독립만세운동은 서울과 평양 같은 대도시뿐 아니라, 충청남도의 작은 농촌 마을에서도 강력한 저항의 불꽃을 일으켰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당진시 정미면 천의장터에서 일어난 4·4 만세운동입니다. 이 만세운동은 단순히 도시의 영향을 받은 지방 시위로 보기 어렵습니다. 주도한 이들이 평범한 마을 주민이 아닌, 면사무소의 공직자들이었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며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4·4 만세운동의 전개 중심지는 대호지면에서 정미면 천의장터로 이어지는 시위 행렬이었습니다. 천의장터는 예부터 장이 서는 날이면 수백 명의 인파가 모이던 지역 상권의 중심지였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공간적 특성을 잘 파악한 주민들은 시위를 계획적으로 준비했고, 구체적인 행동 지침과 태극기, 독립선언서까지 손수 제작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3월 1일 서울 파고다 공원(탑골공원)에서 실제 만세운동에 참가한 후 귀향한 남주원, 이두하, 남상직 등 청년 지식인 그룹이 있었습니다.

대호지·천의장터 4·4독립만세운동기념탑(출처: 국가보훈부 현충시설정보서비스)
대호지·천의장터 4·4독립만세운동기념탑(출처: 국가보훈부 현충시설정보서비스)

 

특히 대호지면의 면사무소 직원들이 직접 조직에 참여하고, 면장까지 시위에 나섰다는 점은 전국적으로 매우 보기 드문 사례입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면사무소는 일제의 말단 통치기구로 기능하며 시위를 억제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호지면에서는 공직자들이 직접 독립운동의 조직자가 되고 행동대장이 되었다는 점에서 항일운동사에서 주목할 만한 장면을 보여줍니다.

 

대호지의 계획, 천의장터의 행동 – 철저하게 준비된 시위

1919년 4월 4일 오전 9시, 대호지면 면사무소 앞 광장에는 약 600여 명의 주민이 도로 수선이라는 명분 아래 모였습니다. 이 모임은 표면상 관권 주도의 공공사업으로 보였지만, 실제로는 철저히 계획된 항일 시위였습니다. 송재만의 선창으로 시작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끝까지 싸운다’는 내용의 선서문은 참여자들의 의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대호지면민 약 800여 명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질서정연하게 정미면 천의장터로 이동했습니다. 천의장터는 이날 마침 장날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수백 명이 추가로 시위에 동참하면서 참가자 수는 1,000명 이상으로 증가했습니다. 당시 일제 경찰은 시위를 제지하려 하였으나, 시위대의 규모와 결속에 밀려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일본 경찰 우에하라는 시위대에 붙잡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게 강요받는 굴욕을 겪었고, 결국 도망쳤습니다.

시위는 단순한 행진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주동자들은 시위를 다시 조직하여 정미면사무소 앞에서 재차 만세를 외쳤고, 일부 일본 경찰이 무력을 사용하려 하자 이에 저항하며 물리적 충돌까지 발생했습니다. 특히 두 명의 일본 순사가 발포하며 일부 시위 참가자가 총상을 입는 사건은 군중의 분노를 극도로 자극했고, 이로 인해 일제 주재소와 일본 민간인의 집까지 공격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에서 천의장터의 민중은 단순한 군중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지도자와 행동대를 정하고, 위기 상황에서 질서정연하게 대응하며, 폭력에 의한 응징까지 감행했다는 점에서 농촌 민중의 자발성과 조직력, 그리고 행동력이 매우 뛰어났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무력 진압과 보복 – 피와 분노로 얼룩진 장터

천의장터에서의 시위는 일제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이었습니다. 특히 면사무소 직원이 앞장섰고, 순사가 폭행당했으며, 민간인이 공격당하고 무기가 탈취되는 일련의 사건은 일제 통치 체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사건 이후 일제는 즉각 당진경찰서와 서산경찰서의 무장 경찰, 홍성 수비대 병력 등을 동원해 진압대를 조직했습니다.

일제 진압군은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무차별 체포와 폭력적인 보복을 가했습니다. 시장 바닥에 사람들을 줄지어 엎드리게 한 뒤 무차별 구타를 가했고, 피 흘리는 군중들은 장독(杖毒)을 피하기 위해 근처 변소의 물을 퍼먹으며 고통을 견뎌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현장에서 21명이 체포되었고, 도합 199명이 검거되어 처벌을 받았습니다. 재판 결과, 주요 주동자 송재만은 징역 5년형, 권주상 등 10명이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고, 일부는 태형 90도를 받았습니다.

시위가 끝난 뒤에도 군중의 삶은 평온하지 않았습니다. 일제는 사복 헌병을 광목 장사로 위장해 주민들의 동향을 감시했고, 마을 이장들을 협박해 출역자 명단을 강제로 제출받았습니다. 여성과 노인까지도 가혹한 심문과 체포에 시달렸고, 일부 주민은 개명하거나 타지로 피신해 평생 고향을 떠나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대호지와 천의 주민들은 그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조선의 자존과 독립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었으며, 그 정신은 훗날까지 지역사회 내 기억으로 이어졌습니다.

 

오늘의 천의장터 – 기억의 장소가 된 역사 현장

현재 천의장터는 충청남도 당진시 정미면 천의길 22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예전보다 규모는 축소되었지만 여전히 지역 시장으로서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과거 포구가 있던 시절에는 물류와 상업의 중심지였고, 1980년대 간척사업으로 포구가 사라진 이후 인구도 감소했지만, 당시 장옥 건물 약 20여 채는 아직도 존재하여 장터의 명맥을 잇고 있습니다.

1995년 4월 4일, 천의 경찰주재소가 있었던 터에는 4·4독립운동기념탑이 세워졌습니다. 이는 당시 시위 현장을 기념하고, 지역 항일운동의 정신을 되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이후 매년 4월 4일에는 4·4만세운동 재현행사가 진행되어 후손과 지역민, 학생들이 함께 과거를 기리고 있습니다.

천의장터 4·4 만세운동은 단지 한 지역의 우발적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계획된 저항이었고, 조직된 행동이었으며, 무엇보다도 공직자와 민중이 함께 일어난 항일운동이었습니다. 특히 면사무소 직원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사례는 전국 3·1운동 사례 중에서도 매우 희귀한 일이었습니다. 이는 조직 내부에서조차 독립에 대한 열망이 깊게 퍼져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이처럼 이름 없는 수많은 지역의 외침이 모여 만들어졌습니다. 당진의 대호지와 천의장터는 그 목소리의 한 축이었고, 지금도 기억 속에서 조용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지역의 역사와 민족의 정신은 이렇게 일상 속 공간에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