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역사와 인물

물질보다 강한 외침 – 1932년 제주 해녀들의 항일 봉기, 생존을 넘어 민족의 이름으로

나나77. 2025. 7. 3. 10:20

1932년 겨울, 바닷속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제주 잠녀(潛女, 일반적으로 ‘해녀(海女)’라고도 합니다. 이후 글에선 해녀라 칭하겠습니다.)들은 자신들의 호흡보다 더 큰 소리를 세상에 내기 시작했습니다. 삶의 터전인 바다에서 물질로 생계를 이어가던 그들에게,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억압이 다가왔습니다. 그 억압은 단순히 저임금이나 부당한 계약 형태가 아니라, 식민지 체제 아래서 일제 당국과 일본 상인, 어용 잠녀조합이 함께 결탁하여 해녀들을 수탈하는 구조 그 자체였습니다. 해녀들은 자신들의 물질 노동이 단순한 경제활동이 아니라 생존의 권리,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자존을 지키기 위한 항거로 이어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제주 해녀들은 오래전부터 제주 해양 문화의 핵심을 이루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 들어, 이들의 경제활동은 조합이라는 이름을 앞세운 일제 식민지 권력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잠녀조합은 원래 해녀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조직이었지만, 실제 운영은 일본인 간부에 의해 좌지우지되었고, 해녀들의 이익은 철저히 외면되었습니다. 해녀들은 일본 상인들과 조합 간의 불평등 계약에 시달리며, 물질한 수익조차 제 값에 팔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부당함은 점차 분노로 바뀌었고, 결국 1932년 1월 제주도 구좌면과 성산면에서 전무후무한 여성 주도 항일투쟁이 일어났습니다.

제주 해녀항일운동기념탑(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근현대사아카이브)
제주 해녀항일운동기념탑(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근현대사아카이브)

 

당시 해녀들의 외침은 단순히 생활고에 대한 항의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착취하는 일본 상인을 몰아내라’, ‘잠녀조합은 우리의 권리를 보호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는 명백히 정치적이고 구조적인 저항이었습니다. 조용한 바닷가 마을에서 시작된 물결은, 곧 제주 전역을 뒤흔드는 항쟁으로 발전했습니다. 여성들의 생존권 투쟁은 식민지 경제체제에 대한 명확한 문제제기로 이어졌고, 이는 제주 해녀항쟁이 한국 여성운동사 및 항일운동사에서 갖는 상징적 위상을 더욱 높여줍니다.

 

진정서를 넘어선 실천 – 두 차례에 걸친 항쟁의 전개 과정

해녀들의 분노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1932년 1월, 구좌면 하도리 해녀들이 중심이 되어 제주도사에게 진정서를 제출합니다. 이 진정서에는 총 8개 항목이 담겼다. 대표적인 요구 사항은 미성년 해녀와 고령 해녀의 육지 출가 절차 간소화, 일본 상인에게 주어지는 우선권 폐지, 조합장의 자진 사퇴, 등급제 철폐와 가격 협상권 보장, 날씨와 관계없이 매수 보장, 주재원 제도의 철폐 등이었습니다. 진정서는 식민통치 구조 내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한 공식 문서였습니다. 그러나 제주도사는 이 요구를 묵살했고, 해녀들의 분노는 조직적 행동으로 치닫게 됩니다.

1차 시위는 1932년 1월 7일, 세화리 오일장에서 전개되었습니다. 구좌면 하도리와 세화리의 해녀들이 연합하여 장터로 행진했으나, 일제 경찰은 이를 강제로 해산시켰습니다. 해녀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같은 달 12일 다시 대규모 시위를 준비했습니다. 신임 제주도사 다구치 테이키가 순시 차 세화리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한 해녀들은 하도리와 세화리 사이 연두막 동산에 집결하여 길을 막고 항의했습니다. 이들은 "진정서에 아무런 회답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우리를 착취하는 일본 상인을 몰아내라"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이날 시위는 단지 목소리를 낸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도사의 차량을 가로막은 해녀들은 경찰의 개입에도 물러서지 않았고, 그 결과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등 주동자들이 연행되어 고문과 취조에 시달리게 됩니다. 해녀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1월 24일 세화리 경찰주재소에 500명이 몰려가 억류자 석방을 요구하며 물리적 충돌을 벌입니다. 순사의 복장이 찢기고, 부상자가 발생하는 격렬한 상황이 벌어졌으며, 해녀들은 이후 우도로 피신하지만 1월 26일 다시 체포되고 맙니다. 이때 해녀 800명이 선착장을 에워싸며 저항했지만, 일제 경찰은 공포탄을 쏘아 진압에 나섰고, 결국 1월 27일 마지막 시도도 무산되었습니다.

 

해녀항쟁의 역사적 위상 – 여성 주체, 민족 저항의 아이콘

제주 해녀항쟁은 단순히 ‘지역적 생계 투쟁’으로만 이해할 수 없는 다층적 의미를 가집니다. 이 사건은 첫째, 조선의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벌인 가장 대규모의 항일 시위라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여성들의 정치적 주체성은 조선 후기에서도 드물었고, 일제강점기에는 더더욱 제한되었지만, 제주 해녀들은 그러한 한계를 깨고 스스로 권리를 요구하고 행동한 최초의 집단 중 하나였습니다.

둘째로 이 항쟁은 식민지 경제 수탈 구조에 대한 체계적인 저항이었습니다. 단순한 가격 투쟁이나 계약 불이행 항의가 아니라, 조합 운영 방식, 조합장의 임명권, 일본 상인의 배제 등 ‘구조적 불평등’에 대한 직접적 문제제기였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도 파장이 컸습니다. 해녀들은 단지 피해자나 희생자가 아니라, 조직적으로 대응하며 식민권력과 정면으로 충돌한 ‘행동하는 주체’였습니다.

셋째, 이 항쟁은 해녀 공동체의 연대성, 자생적 조직력, 여성 리더십이 어떻게 현실에서 발휘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입니다. 제주라는 지리적 특성과 해녀들의 생계 공동체 구조가 결합하면서, 외부 억압에 맞서 하도리, 세화리, 성산, 우도 등 다수 마을이 자발적으로 연대하였습니다. 이는 민족독립운동이 특정 지식인이나 계몽운동 차원을 넘어, 생계의 최전선에 있던 민중들에 의해 어떻게 실현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기억과 계승 – 연두막 동산에서 해녀들의 항거를 기리다

제주 해녀항쟁의 기억은 오늘날 제주시 구좌읍 연두막 동산에 세워진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을 통해 계승되고 있습니다. 이곳은 2차 시위가 벌어졌던 실질적 장소이며, 1998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기념공원이 조성되었습니다. 공원 한가운데에는 배를 상징하는 기단과 돛대를 형상화한 비신, 그리고 어구를 든 세 명의 잠녀 조각상이 있습니다. 이 조각상은 단순한 상징물이 아니라, 실존했던 부춘화·김옥련·부덕량 등 주동자의 이름을 간직한 역사적 인물상으로, 항쟁의 무게를 후대에 전하고 있습니다.

과거 세화리 오일장은 이제 농경지로 바뀌었지만, 해녀들의 흔적은 연두막 동산 기념공원을 통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제주 해녀들은 단순한 전통 문화의 상징이 아니라, 역사 속 실질적 저항의 주체였다는 사실은 점차 국내외에서 재조명되고 있으며,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제주 해녀 문화’의 깊은 역사적 맥락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권리의 뿌리에는 바로 이처럼 이름 없이 물질하며, 역사 속에 물결을 남긴 제주 해녀들의 투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제주 바다 위를 떠돌며, 불의에 맞선 정의의 울림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