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역사와 인물

활명수의 탄생지,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다 – 종로 동화약방과 서울 연통부의 역사

나나77. 2025. 7. 4. 00:31

1897년 한성부 서소문 차동, 지금의 서울 순화동에는 단순한 약국이 아닌 한국 제약사와 독립운동사의 결정적 장소가 하나 생겨났습니다. 이곳은 바로 동화약방이었습니다. 이 약방은 단순히 소화제를 제조·판매하던 민간 상점이 아니었습니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약 ‘활명수(活命水)’를 개발한 민병호에 의해 설립된 민족기업이었고, 3·1운동 이후에는 상하이임시정부의 서울 연통부(聯通府)로 기능하며 비밀 연락망과 독립운동 자금의 중계 거점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서울연통부지 기념비(출처: 동화약품 홈페이지)
대한민국임시정부 서울연통부지 기념비(출처: 동화약품 홈페이지)

 

동화약방의 대표 상품 활명수는 단순한 소화제가 아니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물’이라는 이름처럼, 당시 급성 위장질환으로 사망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시절, 활명수는 말 그대로 죽음을 막아주는 기적의 약수로 불렸습니다. 민병호는 한의학 지식과 궁중의 비방, 그리고 서양의학을 접목해 활명수를 제조했고, 이는 대중 질병의 대표적 치료제로 전국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활명수는 국민 건강을 지키는 물약이었지만,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나라를 살리는 역할까지 하게 됩니다. 동화약방은 그 수익금 중 일부를 임시정부의 독립자금으로 전달하였고, 서울 중심부에서는 상하이임시정부와의 연계를 위해 ‘서울 연통부’를 설치하는 비밀 행정조직의 본거지 역할도 담당하게 됩니다. 한 병의 약이 나라를 살리고, 하나의 상점이 민족의 심장으로 뛰기 시작한 것입니다.

 

동화약방과 민병호 – 궁중 지식과 서양의학이 만난 혼합의 지점

동화약방을 세운 민병호는 조선 왕실의 선전관 출신으로, 궁중의약에 대한 높은 지식을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의료선교사 호러스 알렌(Horace Allen)으로부터 서양 의술의 영향을 받아, 동서양 의학을 혼합한 신약 ‘활명수’를 개발했습니다. 이 약은 궁중의 약조법에 서양 약재를 혼합하여 제조된 일종의 ‘복합처방약’으로, 당대 의료 수준에서 유례없는 효능을 보이며 대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활명수는 급체, 위장염, 식중독 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빠르고 즉각적인 효과를 제공하면서 민중 사이에서 신약(神藥)으로 불렸습니다.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닙니다.”라는 문구로 유명한 광고처럼, 활명수는 한국 제약 산업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브랜드로서 현재까지도 생산되고 있습니다.

특히 2022년 기준으로 활명수의 누적 판매량은 90억 병에 달한 것을 보면, 단순한 약품이 아닌 국민 생활에 깊숙이 자리 잡은 브랜드임을 입증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동화약방의 역사적 의미는 이 제품의 상업적 성공이 아니라, 이 약방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의 연결통로였다는 점에서 더욱 빛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서울 연락망 – 연통부 설치와 활동

1919년 3·1운동 이후 국내외에는 임시정부 수립이 이어졌으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상하이에 본부를 둔 대한민국 임시정부였습니다. 임정은 국내와의 원활한 정보소통과 자금 확보를 위해 연통제(聯通制)를 도입했고, 그 일환으로 서울에 비밀 행정기관인 ‘서울 연통부’를 설치하게 되었습니다. 이 연통부의 연락기지로 선택된 곳이 바로 동화약방이었습니다.

연통부 설치는 상하이에서 파견된 이종욱(李鍾郁)이 중심이 되어 기획되었습니다. 그는 종로 연건동 숙소에서 신현구, 송세호, 나창헌, 윤종석, 전필순 등과 회합하여 연통부 조직안을 논의했고, 당시 동화약방의 운영자였던 민강(閔橿)에게 장소 제공을 요청하였습니다. 민강은 아버지 민병호의 뜻을 이어받아 흔쾌히 수락하였고, 이곳은 임시정부와 국내 비밀결사 간의 연락창구이자 자금 조달처로 기능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동화약방은 활명수 판매 수익 중 일부를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면서 독립자금을 후원하는 역할도 맡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민강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는 등의 고초를 겪게 되었고, 그 여파로 서울 연통부의 기능은 1922년경 약화되었으나, 동화약방은 독립운동의 아주 중요한 공간이었습니다.

 

기억과 왜곡 사이 – 연통부 표석의 아쉬운 현재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서울특별시는 종로 순화동 동화약방 터에 ‘서울 연통부지 표석’을 세웠습니다.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된 비밀 행정부서가 존재했던 사실을 기념하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그 표석은 역사적 의미를 온전히 담기엔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표석은 전통적인 형태가 아닌 사람 모양을 형상화한 화강석 조형물로 제작되었고, “서울 연통부지”라는 문구가 붙었지만 내용은 부정확하고 단편적이었습니다. 특히 연통부 활동의 중요성보다는, ‘기능이 약화되었다’는 표현에 집중되었고, 심지어 인현왕후의 탄생지를 언급하는 등 맥락 없는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더불어 민병호부터 이어지는 동화약품 대표들의 독립운동 참여 사실은 일절 언급되지 않아, 동화약방의 역사와 공적을 축소시킨 표문이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처럼 동화약방과 서울 연통부는 분명한 독립운동사적 현장임에도, 그 의미가 충분히 기념되고 있는지에 대해선 재검토가 필요합니다. 단순히 기업의 역사가 아니라, 한 나라의 자주를 위해 숨겨진 역할을 했던 장소이므로 제대로 된 역사교육의 장이자 후손들이 기억해야 할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향후 표석의 문구 수정과 함께, 독립운동가들의 숨은 이야기를 담은 상세한 안내가 마련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