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역사와 인물

덕과면에서 시작된 불꽃, 4월 3일 만세의 외침이 남원을 뒤흔들다

나나77. 2025. 7. 1. 09:39

1919년, 일제의 식민통치에 항거하여 전 민족이 일어선 3·1운동은 전국 각지로 번져갔습니다. 전라북도의 남원군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남원군의 중심인 남원읍에서는 초기의 삼엄한 경계 탓에 만세운동이 쉽게 발생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남원군 덕과면에서, 조용하지만 거대한 저항의 외침이 터져 나왔습니다. 바로 4월 3일, 덕과면 신양리 도화곡에서 벌어진 800여 명의 만세시위는 남원지역 최초의 3·1운동이었습니다.

이 만세운동은 단순한 우발적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지역의 천도교인들 사이에 퍼진 민족 독립의 열망은 기미독립선언서의 전달과 유포, 만세시위 준비를 통해 조직적이고 의도적인 민중 항쟁의 형태로 발전했습니다. 특히 덕과면장 이석기와 면직원 조동선, 유지 이성기 등 지역 공직자와 유력 인사들이 직접 시위를 기획하고 주도했다는 점에서, 이 운동은 지역 내부로부터 자생적으로 조직된 항일운동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남원 3·1운동 발상지 기념탑(출처: 현충시설정보서비스)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 덕과면의 만세운동은 단순한 지역 시위가 아니었습니다. 이 시위는 남원읍과 인근 지역으로의 3·1운동 확산에 결정적인 불씨가 되었으며, 일제의 통치 하에서도 민중의 조직력과 결단력이 얼마만큼 강력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로 남게 되었습니다.

 

천도교 네트워크를 통한 기미독립선언서 확산

남원 덕과면 3·1운동의 기점은 인근 임실 오수면에서 시작됐습니다. 1919년 3월 2일 새벽, 천도교 전도사 이기송은 덕과면 사율리에 거주하는 천도교 신도 이기원, 황석현, 황동주 등에게 약 40여 장의 기미독립선언서를 전달했습니다. 이후 이기원은 아침 8시경, 이 독립선언서를 남원읍 금동의 천도교 교구실로 전달하였고, 유태홍을 통해 다시 읍내 전역과 운봉면, 동면 등지로 전파되었습니다.

특히 독립선언서의 유통은 단순한 전달이 아니라, 천도교 조직 내에서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협력 활동이었습니다. 황석현은 선언서 일부를 보절면 천도교인 김덕인에게 전달해 면사무소 및 헌병주재소 게시판에 붙이도록 했고, 황동주는 선언서를 기매면의 문경록에게 전달하여 각 마을에 부착되도록 조치했습니다.

이러한 조직적인 활동 덕분에 3·1운동의 정신과 내용은 일제의 감시망을 뚫고 농촌 지역까지 깊숙이 전달되었으며, 이는 4월 3일 덕과면 만세시위의 사전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천도교를 기반으로 한 민족 종교 네트워크는, 당시 농촌 사회의 항일 정서를 조직화하는 핵심 동력이 되었습니다.

 

덕과면 도화곡에서 터져 나온 800명의 외침

4월 3일은 덕과면에서 기념식수행사가 예정된 날이었습니다. 이석기 면장은 이 날짜에 맞춰 만세시위를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이미 3월 31일 ‘주장회의’를 열어 각 가정에서 최소 1명씩 신양리 뒷산 도화곡으로 집결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또한 그는 직접 ‘만세운동 참가 취지서’와 ‘경고아동포제군(警告我同胞諸君)’이라는 격문을 작성하고 이를 각 면사무소에 공문인 것처럼 꾸며 각 면장에게 발송했습니다.

그날 도화곡에는 800여 명의 주민이 모였고, 면사무소 직원들과 헌병 주재소 직원들도 현장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식수행사가 끝난 직후, 이석기가 시위의 정당성을 강조하며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그가 외치자 조동선, 이풍기, 이승순, 복봉순, 복경화, 강응화, 김택두, 이석화 등이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이를 신호로 모인 군중 모두가 만세를 외치며 시위가 시작되었습니다.

시위대는 곧바로 남원~전주 간 대로변으로 가두 행진을 펼쳤고, 기매면 오신리의 헌병분견소 방향으로 향했습니다. 이석기는 오백룡의 집 지붕 위에 올라가 격문을 낭독하며 군중의 사기를 높였고, 대한독립만세의 구호는 골짜기와 마을을 가득 메웠습니다. 그러나 결국 헌병과 마주한 시위대는 이석기와 조동선의 자진 체포되고 자발적 해산하였습니다.

 

지역의 첫 외침이 남긴 유산과 기억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이석기, 조동선, 이풍기, 이승순 등은 체포되어 광주지방법원 남원지청에서 각각 1년 반에서 1년의 징역형을 언도받았습니다. 항소와 복심, 고등법원까지 거친 끝에 최종적으로 이석기는 2년, 조동선은 1년 6개월, 나머지는 1년형을 확정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외에도 함께 시위에 참여한 복봉순, 강응화, 김택두 등도 6개월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투쟁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덕과면에서의 만세시위는 남원읍 중심의 대규모 만세운동을 자극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고, 다음날인 4월 4일 남원읍 장날에는 수많은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이 동참한 시위가 전개되었습니다. 이 시위에서 청년 방극용이 일제 헌병의 총격에 현장에서 순절하였고, 그 소식을 들은 그의 아내 역시 항의 중 살해당하는 비극도 뒤따랐습니다.

이후 남원 서쪽 교룡산에서는 봉화시위까지 이어졌고, 지역 전체가 독립의 함성으로 가득 찼습니다. 덕과면의 첫 만세 외침은 불붙는 기폭제가 되었고, 그 정신은 후대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현재 남원시 덕과면 사율리 동해골에는 ‘남원 3.1만세운동 발상지 기념탑’이 세워져 있으며, 국가보훈처는 이를 국가 현충시설로 지정하였습니다. 이곳은 단지 조형물이 아니라,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한 축을 기억하는 정신적 이정표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름이 남겨져 있진 않지만 독립을 위해 노력한 일반 민중들의 행동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