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역사와 인물

군산 옥구, 땅을 지키려 들고 일어선 농민들 – 1927년 소작쟁의의 불꽃

나나77. 2025. 6. 30. 19:07

1920년대 말, 조선의 농촌 사회는 전례 없는 위기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일제의 식민지 수탈정책은 조선인의 토지를 대규모로 강탈하여 일본인 지주들에게 분배하였고, 그 땅에서 살아가야 했던 조선 농민들은 살인적인 소작료에 신음해야 했습니다. 전라북도 군산시 서수면, 당시 옥구군 서수면에 위치한 이엽사농장은 이러한 식민지 농업 수탈의 전형적인 사례였습니다.

이엽사농장 사무실 터(출처: 독립기념관)
이엽사농장 사무실 터(출처: 독립기념관)

 

옥구의 농민들은 더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땅을 되찾겠다는 각오로 조직을 결성했고,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인 지주와 이를 보호하는 일제 경찰은 그들의 호소를 묵살하고 강압적으로 탄압했습니다. 그 결과, 1927년 11월부터 12월까지 수개월간, 옥구의 농민들은 조직적인 대항을 통해 조선 농민사에 길이 남을 항쟁을 벌이게 됩니다.

이 글은 옥구 소작쟁의의 배경과 전개, 그리고 그 역사적 의의를 네 가지 측면에서 조명합니다. 이 소작쟁의는 단순한 지역적 분쟁이 아니라, 식민지 수탈체제에 정면으로 저항한 민중 투쟁의 상징이었으며, 나아가 노동자, 학생과의 연대를 통해 사회 전체의 저항 정신을 고조시킨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소작료 7할의 고통, 일본인 농장주 이엽사의 횡포

옥구 소작쟁의가 발생한 배경은 명확합니다. 1920년대 중반, 일본 니가타 출신의 시로세 슌조와 그 아들 시로세 료사쿠는 전라북도 전주에 본점을 둔 식민농업회사 ‘이엽사’를 설립하였습니다. 이 회사는 삼례, 익산 황등, 옥구 서수 등지에 걸쳐 총 1,200정보의 농지를 보유하며, 약 1,700여 명의 조선 농민을 소작농으로 이용해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조선 농민들에게 7.5할이라는 살인적인 소작료를 강요하였습니다.

옥구 서수면에 위치한 서수농장은 본래 1905년 기와자키 후리히로가 설치한 천기농장을 인수한 것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이엽사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조선 농민을 수탈했으며, 마을 단위로 땅을 빼앗고 소작권을 재분배하며 농민의 생존 기반을 무너뜨렸습니다. 그 결과 농민들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고, 마침내 농민 스스로 조직을 결성해 대응에 나섰습니다.

농민들은 ‘옥구농민조합’을 결성하였고, 위원장 장공욱을 중심으로 소작료 인하 투쟁을 개시했습니다. 그들은 반복적으로 4.5할 수준으로 소작료를 인하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농장 측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당시 농민들은 협상에서부터 투쟁까지 철저히 조직적이었으며, 소작료 문제는 단순한 생계 문제가 아니라 생존권, 나아가 민족의 문제로 인식되었습니다.

 

농민에서 학생·노동자로, 대규모 연대 투쟁의 확산

옥구농민조합이 이엽사에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다 거절당한 후, 1927년 11월 24일 농민들은 소작료 납부 거부를 결의하고 쟁의에 돌입했습니다. 다음 날, 일제는 서수면 경찰주재소를 통해 조합 간부 장태함을 체포했고, 이어 군산경찰서에서 형사대를 파견해 총 36명의 간부를 체포하여 각 주재소에 구금했습니다. 이에 500여 명의 농민들은 주재소를 습격하여 간부들을 구출하는 실력 투쟁에 나섰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농민의 시위가 아니었습니다. 농민들은 곧바로 군산으로 이동해 경찰서 앞에서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이 시위에는 지역의 학생과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사회 각계각층이 농민의 정당한 투쟁에 연대하면서, 옥구 소작쟁의는 지역 단위를 넘어 사회 전체로 확산된 민중 항쟁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에 당황한 일제는 군산경찰서 외에도 인근 경찰서와 소방대까지 동원해 시위를 강경 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엽사 측은 소작료 인하를 더욱 강경하게 거부하였고, 일제는 체포된 농민들에게 가혹한 처벌을 가하며 사건을 봉쇄하고자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약 80여 명이 체포되었고, 그중 34명이 유죄 판결을 받는 등 처참한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드러난 민중의 결속력은 향후 전국 각지의 농민운동과 항일운동에 깊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단순한 경제투쟁이 민족적 항쟁으로 전화된 대표적 사례였고, 단일 농장 쟁의가 학생·노동자·시민을 포함한 전 사회적 저항으로 확대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기억 – 항쟁의 흔적을 지켜내는 공간

1927년 옥구 소작쟁의의 역사적 장소는 오늘날 군산시 서수면 서수리 1085-1 일대, 임피중학교 근처에 위치합니다. 이 지역은 과거 이엽사 농장 사무실이 자리했던 공간으로, 당시 500여 명의 농민들이 심야 시위를 벌였던 역사적 현장입니다.

1995년 6월 17일, 지역 주민들과 후손들이 뜻을 모아 ‘옥구농민항일항쟁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이 기념비는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라, 항일운동의 정신을 후대에 전하는 기억의 장소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비문에는 당시 옥고를 치른 조합원 34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뒤편에는 이엽사 농장 사무실 터가 아직 남아 있어 역사 교육의 장으로도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 기념비는 지역 주민들이 스스로의 역사에 자긍심을 가지고 과거를 되새긴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젊은 세대들이 이 장소를 통해 식민지 시대의 현실과 민중의 저항을 체험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교육적 가치도 높습니다. 오늘날 군산이 갖는 독립운동의 상징성은 바로 이와 같은 공간 기억의 힘에서 비롯됩니다.

옥구 소작쟁의는 단지 조선 농민의 고난사를 보여주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맞선 주체적 민중운동, 그 안에서 조직과 연대, 실천이 얼마나 강력한 저항의 힘이 되는지를 증명한 사건입니다. 군산의 들녘에서 피어난 저항의 불씨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외침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으며, 어떻게 계승하고 있는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