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쯤 지나치는 동두천의 평화로. 평범한 도심의 풍경 속에서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는 이 길에, 2023년부터는 특별한 이름이 붙었습니다. 그 이름은 바로 ‘3.1.만세로’. 이 명예도로는 단순한 도로명이 아닙니다. 이는 104년 전, 이 땅의 주민들이 한 목소리로 외쳤던 “대한독립만세”의 울림이 고스란히 새겨진 상징입니다. 지금 우리가 걷는 이 거리 한복판에서, 누군가는 태극기를 들고 목숨을 걸고 만세를 외쳤습니다.
동두천에서 일어난 이 운동은, 서울의 물결이 지역으로 흘러들어가며 하나의 ‘현장’으로 완성된 민족 저항의 실체였습니다. 도로 하나에 담긴 정신은 한 지역의 기억을 넘어, 전국적인 독립운동의 한 조각을 복원하는 데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동두천 3·1운동의 발생 배경, 준비 과정, 역사적 의의, 그리고 오늘날 기념사업까지 살펴보며, 이 지역이 어떻게 민족사의 흐름에 기여했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경기 북부에 피어난 자발적 항일의 불꽃
1919년 3월, 한반도 전역은 들불처럼 퍼진 독립의 열기로 타올랐습니다.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은 민족대표 33인의 선언과 함께 전국 방방곡곡으로 확산되었고, 이는 곧 지역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냈습니다. 특히 경기도 지역의 3·1운동은 주목할 만한 특징을 지닙니다. 외부 엘리트나 학생 조직의 영향 없이, 마을 단위의 공동체가 스스로 조직하고 행동에 나섰다는 점입니다.
동두천 역시 그러한 흐름 속에서 민족의 한 줄기를 이뤘습니다. 당시 동두천은 행정상 양주군에 속해 있었고, 주변 지역에서 벌어진 만세운동 소식이 빠르게 전파되고 있었습니다. 3월 13일, 남양주 평내리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와부, 진접, 화도 등으로 이어졌고, 동두천 사람들 역시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공감대를 형성해 나갔습니다.
서울의 배재학당에서 학업 중이던 청년 정원이는 동두천과 서울 간 연락을 담당했고, 지역 청년 지도자 한원택과 박창배는 태극기와 선언서를 준비하며 본격적인 거사를 계획했습니다. 이들은 송내, 지행, 기촌, 상봉암 등 동두천의 여러 마을에 책임자를 두고 조직적으로 거사를 준비했습니다.
결국 3월 26일, 동두천장의 날을 거사일로 삼고 시장 한복판에서 대대적인 만세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당시 시위에 참여한 인원은 무려 1,300여 명에 달했고, 시위대는 면사무소와 기차역까지 행진하며 일제의 무단통치를 정면으로 거부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지역 공동체의 힘, 그리고 민족의식으로 뭉친 평범한 농민과 상인들이 있었습니다.
만세운동의 절정과 진압, 그리고 번짐
3월 26일, 동두천시장에는 평소보다 훨씬 많은 인파가 몰렸습니다. 이들은 단지 장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서로가 함께할 ‘그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준비된 태극기가 하늘을 수놓고, 선언서가 낭독되며 만세 삼창이 시작되었습니다. 1,300여 명의 주민들은 하나같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이는 단지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삶의 절규였으며 자유에 대한 갈망이었습니다.
시위대는 면사무소로 향했고, 면장 신공우에게 선언서 서명과 선창을 요구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시위대의 뜻에 동조하며 함께 만세를 외쳤고, 직접 시위대를 이끌고 기차역으로 향했습니다. 이 장면은 당시 동두천이 단순한 반일 감정을 넘어서 공동체 전체가 연대했던 고장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일제는 이런 움직임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동두천 일본 헌병은 즉각 인근 주내면 헌병 본대에 지원을 요청했고, 기마헌병대가 출동해 기차역 일대에서 시위를 무력 진압했습니다. 시위대와 헌병대 사이에 격렬한 충돌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주동자 7명이 체포되었습니다. 당일의 시위는 물리적으로는 막을 내렸지만, 그 정신은 전혀 꺾이지 않았습니다.
동두천에서 발생한 만세운동의 소식은 양주 전역으로 퍼졌고, 이후 3월 26일부터 31일까지 6일간 무려 20여 건의 후속 만세운동이 인근 지역에서 연쇄적으로 벌어졌습니다. 노해 도봉, 구리 상봉, 장흥, 백석, 광적, 아천, 창동, 부평 등지에서 동두천의 함성을 따라 마을 주민들이 거리로 나왔습니다. 이는 동두천이 단순한 ‘하나의 만세운동 현장’이 아니라, 경기 북부 만세운동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는 역사적 의미를 갖습니다. 그 중심에 동두천이라는 고장이 있었다는 점은 반드시 기억되어야 합니다.
그날의 기억을 되새기다 – 3.1.만세로의 의미
10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뒤, 동두천은 그날의 외침을 잊지 않기 위해 하나의 결단을 내렸습니다. 2023년 3월, 동두천시 평화로 1.1km 구간이 ‘3.1.만세로’라는 이름으로 명예도로에 등록되었습니다. 이 명예도로는 지역 내 최초이자 유일한 상징 도로로, 단순히 길 이름을 바꾼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기억을 거리 위에 올려놓은 것이었습니다.
3.1.만세로는 특정 인물의 이름을 따온 것이 아닙니다. 이 길에는 동두천 주민 전체의 정신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름 없는 농민과 상인, 학생과 노인이 하나로 연대했던 그날의 정신은, ‘우리 동네에도 독립운동이 있었다’는 자긍심을 심어줍니다. 전국적으로 200여 개의 명예도로가 존재하지만, 대부분이 유명인 이름이나 문화예술 중심 테마인 것과 달리, ‘3.1.만세로’는 지역 민중의 항일정신을 기리는 매우 특별한 사례로 평가됩니다.
이 명예도로의 지정은 단순히 과거를 되새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도로를 지나는 모든 시민과 방문객이 그 이름을 보는 순간, 스스로 질문하게 됩니다. “왜 이 길의 이름이 만세로일까?” 바로 그 순간부터, 동두천의 역사와 3·1운동은 다시 살아 움직입니다.
동두천 3·1운동, 지역을 넘어 민족의 유산으로
동두천의 3·1운동은 ‘한 지역의 역사’로만 보기엔 그 울림이 너무 큽니다. 이 운동은 수도권 외곽의 한 마을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파급력은 경기 북부 전역으로 퍼졌고, 민족 전체의 저항 정신을 상징하는 계기로 자리 잡았습니다.
동두천 주민들은 특정한 지시에 따라 움직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옳다고 믿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름도, 신분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조국의 독립과 자존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외침이 100년이 넘는 시간을 넘어, 오늘날 ‘3.1.만세로’라는 이름으로 부활한 것입니다.
지역의 기억은 쉽게 사라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두천은 잊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세대가 그 기억을 이어갈 수 있도록, 거리 위에 그날의 함성을 다시 세웠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입니다.
그 길을 걸을 때,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날, 이 길에서 누가 어떤 마음으로 만세를 외쳤을까?” 그 질문에 귀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역사를 기억하고 계승하는 첫 걸음을 내디디게 될 것입니다.
'지역의 역사와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포항 덕성장터에서 울려 퍼진 만세의 함성 – 1919년 3월 22일, 대전리 사람들의 항일투쟁 (0) | 2025.07.05 |
---|---|
공주에서 피어난 독립의 불꽃, 영명학교 3·1운동의 진실 (0) | 2025.07.04 |
활명수의 탄생지,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다 – 종로 동화약방과 서울 연통부의 역사 (0) | 2025.07.04 |
부산 백산상회, 무역을 가장한 항일거점 – 부산에서 피어난 안희제의 독립혼 (0) | 2025.07.03 |
물질보다 강한 외침 – 1932년 제주 해녀들의 항일 봉기, 생존을 넘어 민족의 이름으로 (0) | 2025.07.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