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역사와 인물

항일 여성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꺼내야 할 이름

나나77. 2025. 7. 16. 10:06

조선 말기에서 대한민국의 시작까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찬란한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여성’이라는 이유로, 혹은 ‘한 인물’에만 집중되는 역사 서술의 한계로 인해 이름이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인물도 있습니다. 김마리아, 그녀도 그렇습니다. 독립운동사에서 김마리아라는 이름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그녀는 조선 여성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던 시절, 일제의 총칼 앞에서도 끝까지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항일 여성운동의 대모'라 불리는 그녀는 단순한 독립운동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사상가였고, 조직가였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생을 철저히 조국에 바친 실천가였습니다.

김마리아 선생
김마리아 선생(출처: 공훈전자사료관)

그녀가 살았던 시대는 일제강점기, 말 그대로 나라가 없던 시기였습니다. 여성이라는 성별은 곧 침묵을 의미했으며, 교육받는 것조차 특권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김마리아는 조선의 딸이자 민족의 미래로서 스스로 나섰습니다. 교육을 무기로 삼고, 신앙을 길잡이 삼아 시대를 뚫고 나아갔습니다. 그녀의 출발은 결코 특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여정은 평범한 민족주의자를 넘어서, 한 나라의 운명을 바꾸는 데까지 나아갔습니다. 그녀가 왜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인물인지, 오늘날 우리는 더 많이, 더 깊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민족주의자로서의 성장과 여성 독립운동의 개척자

김마리아는 1892년, 황해도 장연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집안은 서울의 명문 양반가 출신으로 조부 대에서 낙향하여 정착했고, 그녀의 부친 김윤방은 개신교에 귀의한 뒤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세우는 등 계몽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어릴 적부터 기독교적 신앙과 계몽사상을 접하며 자란 김마리아는, 소래학교에서 신학문을 익히고, 이후 서울로 올라와 이화학당과 정신여학교를 거치며 교육자로 성장했습니다. 특히 정신여학교에서 받은 세례와 교육은 그녀의 사상에 깊은 뿌리를 내렸습니다.

1910년대 초, 그녀는 광주의 수피아여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여성 계몽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이 시기부터 그녀는 조선의 ‘여성’이 민족의 독립과 교육에서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김마리아는 동경여자학원에서 학문을 이어가며 조선 유학생들과의 교류를 넓혔고, 1919년에는 2.8독립선언에 직접 참여했습니다. 특히, 선언문을 몸속에 숨겨 조국에 들여온 행동은 단순한 참여를 넘어 실제 실행력 있는 독립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귀국 후 그녀는 대구, 광주, 서울 등을 돌며 3·1운동의 불씨를 퍼뜨렸고, 여성 교육자들과 함께 조직적인 항일 활동을 도모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여성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행동으로 나섭니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가 바로 그 결과물입니다. 김마리아는 회장으로서 전국 15개 지부를 조직하고, 2,000여 명의 여성 회원을 이끌며 여성 중심의 항일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는 한국 여성운동 역사에서 매우 선구적인 사례로 평가받습니다. 여성 독립운동가로서 김마리아의 존재감은, 바로 이 시기에 정점에 달했습니다.

 

투옥, 망명, 유학 – 흔들리지 않은 불굴의 삶

김마리아는 자신의 활동으로 인해 수차례 체포되고 고문당하는 고초를 겪었습니다. 1919년 3월 5일, 서울 남대문역에서 벌어진 학생들의 만세시위를 주도한 배후로 지목되어 체포된 그녀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악형과 고문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무려 수개월 간의 구금 끝에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지만, 그녀는 결코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여성 조직을 꾸려나갔고, 다시 체포되어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김마리아는 감옥에서조차 굴복하지 않았고, 결국 병보석으로 풀려난 뒤 상해로 망명하게 됩니다.

상해에서 그녀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상해 지부를 운영하며 독립운동을 이어갔습니다. 임시정부의 황해도 대표로 임시의정원에도 참여했고, 국민대표회의에도 참석하며 정치적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임시정부의 내부 갈등과 독립운동 세력 간 분열은 그녀에게 큰 실망감을 안겼고, 그녀는 이내 미국으로 떠납니다. 미네소타 파아크대학에서 학업을 이어간 그녀는, 이후 시카고대학 사회학 석사과정을 밟고 1929년에 학위를 취득합니다.

미국 유학 중 그녀는 또 다른 여성 독립운동 조직인 근화회를 결성합니다. 여성 유학생 중심의 이 조직은 학문과 정치, 신앙을 결합해 민족주의 운동의 또 다른 흐름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녀는 다시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뉴욕의 비블리컬 세미너리에 진학했고, 1932년 귀국해 원산 마르다 윌슨신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녀의 몸은 이미 수차례의 고문과 감옥 생활로 병들었지만, 교육의 현장에서 독립을 꿈꾸는 여성들을 양성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단순히 독립운동가가 아닌, 한 세대를 가르친 교육자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항일 여성운동가 김마리아

김마리아는 1944년,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평양기독병원에서 순국했습니다. 그녀가 떠날 당시, 많은 동지들과 제자들은 한 시대의 상징이 사라졌다는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여성으로서, 지식인으로서, 그리고 조선인으로서의 사명을 끝까지 지켜낸 삶이었습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녀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며 그 공로를 뒤늦게나마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이름은 많은 이들에게 낯섭니다.

우리는 이제 그녀를 다시 꺼내야 합니다. 김마리아는 단지 과거의 인물이 아닙니다. 그녀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이 ‘독립’이며 무엇이 ‘참된 교육’인지 질문을 던지는 존재입니다. 그녀는 침묵하지 않았고,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끝내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걸어간 길은 곧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정의와 자유, 그리고 평등의 길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뉴스에서 여성 인권, 사회 정의, 국가 정체성에 대한 논의를 접합니다. 그 논의의 중심에, 백 년 전 나라 없는 시대에 자신을 던졌던 김마리아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녀를 기억하는 일은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니라, 오늘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강력한 동력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