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를 울린 여학생들의 함성 – 정명여학교 4.8만세운동의 기억
전라남도 목포시 양동에 자리한 정명여학교는 지금은 평범한 여자중고등학교로 알려져 있지만, 100여 년 전 그 교정은 뜨거운 함성으로 뒤덮인 항일운동의 중심지였습니다.
1919년 4월 8일, 목포의 4.8만세운동은 이 학교의 교사와 여학생들에 의해 촉발되었습니다.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선언은 전국으로 퍼졌고, 목포 역시 독립의 열망으로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목포의 항일운동은 정명여학교와 영흥학교 학생들 양동교회 신도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특히 정명여학교의 여학생들이 주축이 되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의를 지닙니다.
그들은 태극기를 손으로 제작하고, 독립선언서를 숨겨 날랐으며, 시내를 누비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일제의 감시 속에서도 무너짐 없이 거사를 준비했고, 그날 목포는 이들의 외침으로 진동했습니다. 이 글은 정명여학교의 설립부터 4.8만세운동의 전개 과정, 주요 인물의 헌신, 그리고 오늘날 남은 역사적 흔적에 이르기까지, 그날의 외침을 조명합니다.
전남 최초의 여학교, 민족의식을 품다
정명여학교의 역사는 단순히 교육기관의 탄생으로만 설명할 수 없습니다. 1899년, 미국 남장로교 소속의 선교사 스트레이퍼가 부녀자를 위한 교육을 시작하면서 목포여학교의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유진 벨 선교사와 레이놀즈 목사의 교육 선교 활동을 통해 양동교회 부속 공간에서 남녀학생 교육이 병행되었고, 1903년에는 정식으로 영흥학교(남학교)와 목포여학교(여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1914년에는 목포여학교의 교명이 '정명여학교'로 바뀌었고, 전남·광주 지역에서 최초로 보통과 및 고등과를 운영하는 근대식 여학교로 발전하였습니다. 이 시기 정명여학교는 단순한 교과 중심의 교육을 넘어, 민족의식과 기독교 정신을 기반으로 한 자주적 교육을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에게 한문과 성경을 가르치던 곽우영 목사를 중심으로,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민족과 나라의 의미를 가르쳤고, 이것은 이후 1919년 4.8만세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목포의 여성 교육은 정명여학교를 중심으로 크게 발전했으며, 이 학교는 여성들이 사회적 주체로 나설 수 있도록 이끌었습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은 학생들이 두려움 없이 항일운동의 선두에 설 수 있었던 정신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치밀하게 준비된 거사 – 4월 8일의 진실
1919년 4월 8일, 목포시 일대는 만세소리로 뒤덮였습니다. 그 중심에는 정명여학교의 고등과 학생들과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3월부터 철저하게 만세운동을 준비했습니다. 광주에서 전달받은 독립선언서와 격문, 2.8독립선언서 사본 등을 교장 커밍 목사가 비밀리에 수령한 후, 곽우영 목사가 태극기를 그려주었고, 고등과 3·4학년 학생들이 목판으로 태극기를 제작했습니다.
이 과정은 매우 은밀히 진행되었습니다. 태극기와 전단을 숨기기 위해 여학생들은 보자기에 싼 전단을 등에 지거나 쓰개치마 아래에 숨겼습니다. 철저한 보안 속에서도 학생들은 조직적으로 역할을 나누어 움직였고, 4월 8일의 거사를 위한 준비는 차근차근 완성되어 갔습니다.
마침내 그날이 되었습니다. 영흥학교의 김옥남 학생이 울린 종소리는 거사의 신호였습니다. 정명여학교 학생들은 태극기를 쏟아붓듯 공중에 던지며 거리로 뛰어나갔고, 목포 시내는 순식간에 만세의 물결로 가득 찼습니다. 산수정, 재판소, 창평정까지 이어진 이들의 시위는 단지 숫자만 많은 것이 아니라, 그 조직력과 결의 면에서 전국적으로도 손꼽히는 고등학생 주도 만세운동이었습니다.
일제 경찰은 결국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했고, 댕기머리를 잡아끌며 여학생들을 체포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두려움 없이 오후 2시까지 거리 시위를 이어갔고, 그날 저녁에는 졸업생들이 다시 모여 시위를 재개했습니다. 목포의 항일운동은 결코 하루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저항은 10월까지 이어졌고, 1516세 여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시위를 주도하는 등, 정명여학교는 항일의 씨앗을 계속해서 품고 있었습니다.
검거와 처벌, 그리고 이어지는 항거
4월 8일 하루 동안 목포에서는 무려 200여 명이 체포되었습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정명여학교 학생들과 교사들이었습니다. 체포된 학생들은 경찰서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고, 일부는 풀려났지만 교사 김봉원과 이겸양은 구속되어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 시기의 목포는 여학생들이 거리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진풍경이 벌어지는 도시 중 하나였으며, 정명여학교는 이 중심에서 움직였습니다. 이들의 항거는 단지 분노나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준비된 민족운동의 결실이었습니다.
10월 4일에도 이들의 정신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정명여학교 재학생 30여 명이 학교 앞에서 시위를 벌였고, 일제 경찰은 이를 사전에 막기 위해 출동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이날 여학생들의 행동은 교사의 만류로 해산되었지만, 참가자 일부는 취조를 받았고, 다시금 학교는 검거와 압수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정명여학교, 오늘에 전하는 4.8의 울림
오늘날 정명여학교는 과거의 만세운동이 있었던 그 자리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다만 당시의 건물 대부분은 사라졌고, 1912년에 세워진 선교사 사택과 1985년에 건립된 독립기념비만이 그날의 기억을 전하고 있습니다.
1983년, 정명여자중학교 교실 수리 중 천장에서 발견된 독립선언서, 2.8독립선언서 사본, 격문, 독립가 등이 담긴 봉투는 1919년 만세운동이 단지 구호의 외침이 아니라 철저히 준비된 항일 전략이었다는 것을 다시금 증명했습니다.
기념비는 단순한 상징물이 아닙니다. 이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해 외치고 있는가?’ 묻고 있습니다.
정명여학교의 학생들이 보여준 행동은 과거의 영웅담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교육의 힘, 여성의 용기, 그리고 지역이 가진 역사적 자부심을 말해줍니다. 목포는 정명여학교를 통해 항일운동의 역사를 만들었고, 우리는 이 공간을 통해 오늘의 민주시민정신을 이어가야 합니다.
그날의 외침은 여전히 현재형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정명여학교 앞을 지나며, 그녀들이 남긴 발자취를 따라 걷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