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덕성장터에서 울려 퍼진 만세의 함성 – 1919년 3월 22일, 대전리 사람들의 항일투쟁
경상북도 포항시 청하면의 덕성장터는 현재는 평범한 상가 건물들이 줄지어 있는 도심 일각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100여 년 전, 이곳은 경상북도 일대에서 가장 격렬한 3·1운동이 벌어진 역사의 현장이었습니다. 덕성장터는 1919년 3월 22일, 독립을 향한 외침으로 가득 찼습니다. 바로 그날, 송라면 대전리 출신의 기독교인들이 조직한 만세운동이 이곳에서 폭발하듯 일어났던 것입니다.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은 빠르게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경북 포항 지역 역시 그 흐름에 동참했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의 운동은 단순한 동조 시위가 아니었습니다. 덕성장터 만세운동은 철저한 준비와 공동체의 신앙, 조직력이 어우러진 지역 중심의 독립운동이었습니다. 주도세력은 대전리 대전교회 출신의 기독교 신자들이었고, 이들은 거사 전날까지 태극기를 손수 만들고 사람들을 규합하며 만세의 날을 기다렸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조용한 장터의 기억을 되살려야 합니다. 대규모 기념시설이나 국가 차원의 조명이 없더라도, 포항의 이 작은 공간은 여전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이들의 발자취로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덕성장터에서 일어난 3·1운동의 전개 과정, 주요 인물들, 이후 탄압의 실상, 그리고 오늘날 이 역사를 어떻게 기리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기독교 공동체의 연대, 거사의 불씨를 지피다
1919년 3월,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확산되던 시기에 경상북도 영일군(현 포항시) 송라면 대전리에 살고 있던 윤영복은 새로운 결심을 품었습니다. 그는 대전교회에서 활동하던 영수(장로교회 평신도 직분)로, 민족의 독립이라는 신념과 신앙적 양심에 따라 자신이 거사를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윤영복은 먼저 교회 동료였던 오용간, 윤영만과 함께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이 세 사람은 대전교회 예배당과 오용간의 집을 오가며 비밀리에 회합을 열었고, 3월 22일 덕성 장날을 만세시위의 날짜로 결정했습니다.
거사 전날인 3월 21일, 오용간의 집에서는 밤늦게까지 태극기를 제작하는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윤영복과 오용간은 직접 큰 태극기 1장과 작은 태극기 20장을 만들어 배포할 준비를 했습니다. 그들은 단순한 상징을 넘어서, 각자가 태극기를 품고 행진하며 나라의 독립을 외칠 수 있도록 조직화된 활동을 구상했습니다.
이들은 교회의 신자들을 중심으로 동지를 규합해 나갔습니다. 이준석, 안덕환, 안상종, 안천종, 이준업, 이영섭 등이 윤영복 쪽에서 참가했고, 오용간은 김윤선, 김만수, 김유곤, 윤도치, 이상호, 정백용 등과 함께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대부분 대전교회 출신이자 같은 마을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이웃의 집을 돌아다니며 서로의 손을 잡았고, 함께 위험을 감수할 각오를 다졌습니다.
이처럼 덕성장터 만세운동은 단지 몇 명의 용기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한 마을 전체가 믿음과 연대로 만든 계획적인 민족운동이었습니다. 종교라는 공통의 기반은 이들의 의지를 하나로 묶어주는 결정적인 접착제 역할을 했습니다.
3월 22일, 장터를 뒤흔든 함성
1919년 3월 22일, 장날을 맞은 덕성장터는 그 어느 때보다 붐볐습니다. 이 틈을 타 만세운동을 준비한 이들은 미리 품속에 태극기를 감추고 장터에 모였습니다. 시위는 오후 1시경 윤영복과 오용간이 큰 태극기를 높이 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외침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장터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만세 시위에 동참했습니다.
윤영복의 외침에 반응한 이들은 들고 있던 태극기를 꺼내들었고, 시장은 순식간에 민족의 외침으로 가득 찼습니다. 독립선언서는 따로 낭독되지 않았지만, 그날 덕성장터를 울린 목소리는 그 어떤 글보다 강력한 의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시위대는 덕성리 일대를 행진하며 만세를 외쳤고, 이들은 단지 시위에만 그치지 않고 “우리는 조선의 국민이며, 독립된 나라에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마음을 행동으로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열기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일본 경찰이 총검을 들고 나타나 군중을 위협했고, 물리적 진압이 이어졌습니다.
현장에서 23명이 체포되었으며, 이 중 14명은 대전리 출신으로 모두 같은 교회를 다니는 신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체포 즉시 영일경찰서로 이송되었고, 남은 가족들은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독립에 대한 열기는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닷새 후인 3월 27일, 대전리 주민들은 다시 두곡숲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또 다른 만세운동을 이어갔습니다.
혹독한 탄압과 법정에서의 항의
만세시위를 주도한 이들은 짧지 않은 옥고를 치러야 했습니다. 1919년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은 이들 23인에 대해 판결을 했습니다. 윤영복과 오용간은 징역 1년 6월, 윤영만과 이준석은 징역 1년, 그 외 대부분은 징역 8개월에서 6개월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특히 윤영복은 조직자이자 시위 시작의 핵심 인물로서 가장 무거운 형을 받았습니다.
이 가운데 일부는 항소를 진행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윤영만은 시위 전에 검거되어 무죄 판결을 받았고, 이준업은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실형을 살며 일제의 혹독한 탄압을 온몸으로 감내해야 했습니다.
법적 처벌뿐만 아니라, 대전리 마을 전체에도 고통이 닥쳤습니다. 일제는 체포된 이들의 가족을 감시했고, 마을 주민들에 대한 압박도 계속되었습니다. 덕성장터 만세운동이 일어난 이후 대전리의 가구 수는 80여 호에서 50여 호로 급감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마을 공동체는 서로를 돌보며 회복을 이어갔고, 투옥되었던 이들이 출옥한 후에도 교회와 마을은 그들의 귀환을 환영하며 공동체의 힘을 지켰습니다. 덕성장터의 외침은 단지 하루의 사건이 아니었으며, 그 여파는 포항 지역 항일정신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이름 없는 영웅들의 유산, 다시 걷는 만세의 길
오늘날 덕성장터는 그때의 모습을 찾기 어렵습니다. 시장이 사라지고 건물들이 들어서며 공간은 변했지만, 그곳에서 울렸던 외침은 여전히 우리의 역사 속에 살아 있습니다. 다행히 2001년, 송라면 대전리에 '대전 3.1의거 기념관'이 건립되었습니다. 덕성장터 만세운동의 주역들이 활동했던 대전교회 자리에 그들의 정신을 기리는 전시 공간이 마련된 것입니다.
또한 대전리 1리에는 ‘3.1만세운동기념비’가 세워졌고, 이 비석에는 평범한 농민이자 기독교 신자였던 사람들이 민족의 운명을 위해 어떤 결단을 내렸는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포항의 3·1운동은 유명한 인물 없이도 위대했습니다. 윤영복, 오용간, 이준석, 김윤선… 이들의 이름은 교과서에 없을지라도, 지역의 기억 속에서는 살아 있습니다. 덕성장터 만세운동은 중앙 중심의 역사 서술을 넘어, 지역 공동체가 어떻게 민족 독립운동의 중요한 한 축이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순한 기념이 아니라, 그들의 희생과 용기를 일상 속에서 되새기는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만든 위대한 역사, 그들이 걸었던 만세의 길을 우리도 다시 걷는다면, 덕성장터의 외침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