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역사와 인물

공주에서 피어난 독립의 불꽃, 영명학교 3·1운동의 진실

나나77. 2025. 7. 4. 21:32

충청남도 공주에는 조용히 그 자리를 지켜온, 오래된 학교가 있습니다. 바로 ‘영명학교’입니다. 언뜻 보면 평범한 기독교계 사학이지만, 그 교정은 1919년 4월 1일, 공주 지역에서 울려 퍼진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출발한 곳이었습니다.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의 열기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공주 역시 그 대열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공주에서의 만세운동의 그 중심에는 영명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비밀리에 회합을 열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며 조직적인 운동을 준비했습니다. 영명학교는 단순한 교육기관을 넘어 항일운동의 중심지로, 당시 충청도 지역의 청년 독립운동가들이 집결한 공간이었습니다.

영명학교(공주 3·1운동 만세시위 준비지) 기념탑
영명학교(공주 3·1운동 만세시위 준비지) 기념탑(출처: 현충시설정보서비스

 

지금은 당시의 교사나 기숙사는 사라지고 터만 남았지만, 그 의미는 결코 희미해지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공주 영명학교는 3·1운동의 정신을 후대에 전하는 산 교육장으로, 역사의 증인으로서 여전히 빛나고 있습니다.

 

미리 태동한 공주의 독립운동, 불발과 준비

1919년 3월, 공주에서는 이미 3·1운동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앵산공원(현 3.1중앙공원) 앞에 사람들이 모여 만세를 외치려 했고, 장날을 맞은 군중들이 시위를 계획했으나, 일제의 사전 탐지로 번번이 제지당했습니다. 특히 3월 7일과 12일의 시도는 모두 실패로 끝났고, 공주 곳곳의 교회나 천도교 계열에서도 독립운동의 의지를 드러냈으나 강제 해산당했습니다.
당시 일제는 공주에 군 병력을 배치하고 집회를 원천 봉쇄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 속에서도 독립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영명학교 출신의 박장래가 서울 3·1운동을 목격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영명학교 교사 김수철의 방에서 재학생 안기수, 신의득 등과 만나 서울의 상황을 전달하고, “공주 학생들은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느냐”며 자극을 주었습니다.
이 자극은 중요한 변화를 낳았습니다. 학생들은 마음을 다잡고, 본격적으로 만세운동을 계획하기 시작했습니다. 독립가를 담은 쪽지가 유통되고, 서울에서 가져온 선언문이 복사되며, 공주에서 저항을 위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비록 그 시점에서 박장래의 이후 행적은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격려와 정보 제공은 공주 지역 만세운동의 움직임에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공주의 독립운동은 이제 우발적 시도가 아니라, 철저한 계획에 기반한 조직적 행동으로 전환되고 있었습니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바로 영명학교가 있었습니다.

 

영명학교, 공주 만세운동의 심장으로

1919년 4월 1일, 공주장터에서 대규모 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움직임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영명학교는 이미 3월 24일 밤, 교내 교실에서 주요 인사들과 함께 첫 회합을 가졌습니다. 이 자리는 단순한 논의가 아닌 실제 작전을 짜는 비밀결사 수준의 회의였습니다.
참석자는 감리교 목사 현석칠과 안창호, 교사 김관회, 현언동, 이규상 등이었으며, 영명학교 출신 동경 유학생 오익표, 안성호 등도 귀향하여 조직에 합류했습니다. 각 인사들은 역할을 나누었습니다. 김관회는 독립선언서 인쇄와 학생 조직을 맡았고, 이규상은 영명여학교 졸업생 박루이사 등을 찾아가 여학교 학생들과의 연계를 책임졌습니다. 김수철은 선언서 1,000매를 등사하고, 재학생과 졸업생들을 동원했습니다.
3월 말부터는 조직적으로 태극기를 만들고, 참여자를 모집하며 거사의 준비를 완성했습니다. 유우석, 강연, 노명우, 윤봉균 등은 독립선언서를 품고, 이규남은 태극기를 제작하여 나눠주었습니다.
4월 1일 오후 2시, 공주장터에 모인 이들은 선언서를 배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이들은 오후 6시까지 장터를 돌며 시위를 이어갔다. 여성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김현경 교사는 영명여학교 학생들과 함께 시위에 동참했고, 여성의 참여는 이번 운동의 폭과 깊이를 더욱 확장시켰습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외침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이날 밤 김관회의 자택에서 재정비 중이던 주요 인사들이 체포되었고, 이후 재판을 통해 징역형과 집행유예가 선고되었습니다. 하지만 공주 4.1만세운동은 지역사회의 저항 의지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역사의 씨앗이 된 교정 – 영명학교의 유산

영명학교는 1905년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샤프 목사에 의해 설립된 ‘명설학당’에서 출발했습니다. 이후 윌리엄 선교사의 주도로 ‘중흥학교’, 나아가 ‘영명학교’라는 이름으로 발전하며 공주의 첫 근대 사립학교가 되었습니다.
이 학교는 기독교적 가치에 기반한 인격 교육과 민족의식을 강조했고, 이는 자연스럽게 항일운동의 씨앗으로 이어졌습니다. 공주 만세운동 당시에는 교사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으며, 지역 목회자들과의 협력도 적극적이었습니다.
특히 유관순 열사와의 인연은 이 학교의 역사를 더욱 빛나게 합니다. 유관순은 1914년 영명여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수학한 뒤 이화학당으로 편입되었고, 오빠 유우석과 사촌 유경석도 영명학교 출신이었습니다.
유관순이 부모를 잃고 난 뒤, 두 동생을 돌봐준 사람은 영명여학교의 조화벽 교사였으며, 훗날 조화벽은 유우석과 결혼하여 유관순의 시누이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영명학교는 단순한 학문기관을 넘어서, 민족 독립운동과 연결된 가족사와 연대의 공간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영명중·고등학교는 그 전통을 계승하며, 교정 내에는 역사관, 기념탑, 동상 등이 세워져 있습니다. 과거의 영광을 기리는 공간이자, 현재와 미래를 향한 역사 교육의 장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공주의 외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919년 4월 1일의 공주는 단순히 역사 속의 한 페이지가 아닙니다. 당시 사람들의 고민과 자발적 움직임을 보여주는 항일운동이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영명학교가 있었고, 이곳은 학교의 울타리를 넘어 하나의 민족운동 본부처럼 기능했습니다.
독립선언서를 직접 인쇄하고, 태극기를 손으로 만들어 거리로 나아간 이들의 용기와 지혜는 오늘날에도 충분히 교훈이 됩니다. 공주 만세운동은 당시 일제의 엄혹한 감시 속에서도 교육기관과 종교기관, 지역 사회가 하나 되어 만들어낸 독립의 불꽃이었습니다.
지금 그 자리에 교사와 기숙사는 남아 있지 않지만, 그 터는 여전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교정에 우뚝 선 동상과 기념탑은 침묵 속에서도 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명학교를 통해, 지역이라는 작은 단위에서 시작된 연대가 어떻게 민족 전체를 움직이는 물결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봅니다. 공주의 외침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정신은 교과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마음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