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학생항일운동의 진짜 중심은 어디였을까? 지역사 속 민중의 함성
광주 학생항일운동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1919년의 3·1운동이 전국적인 민중봉기로 촉발된 독립선언이었다면, 1929년의 광주학생운동은 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전개한 조직적이고 대중적인 항일시위였다는 점에서 주목받습니다. 이 운동은 광주라는 특정 지역에서 시작되었지만, 단순히 지방 학생들의 반일 시위를 넘어, 전국 300여 개 학교, 5만 명 이상의 학생들이 동참한 ‘제2의 3·1운동’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운동의 시발점을 “광주역 사건”이라는 한 장면으로만 기억합니다. 물론 광주역에서 일본인 학생의 조선인 여학생 폭행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조선인 학생들의 조직화된 준비, 지역 사회의 잠재된 분노, 그리고 학교와 교회, 시민이 함께 움직였던 공동체의 힘이 존재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단순한 사건 개요가 아니라, 광주 학생항일운동의 ‘진짜 중심’이 어디였는지, 즉 이 운동이 어떻게 광주라는 도시의 구조와 지역사 속에서 가능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려 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격렬한 시위 장면 뒤에 숨겨진 지역사회의 흐름과 민중의 저항 의지를 통해, 우리는 이 운동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광주역 사건은 ‘불씨’일 뿐, 운동의 바탕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1929년 10월 30일, 광주역에서 일본인 학생이 조선인 여학생에게 폭행을 가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겉으로 보면 단순한 개인 간의 문제로 보일 수 있었지만, 당시 조선 사회에 쌓여 있던 민족 차별에 대한 분노와 억눌린 항일 의식이 격렬하게 폭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광주고등보통학교(현 광주일고), 수피아여학교, 광주사범학교 등지에서는 이미 학생들 사이에 독서회, 성진회 등 비밀학생조직을 중심으로 민족 자각 운동이 은밀히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일제는 조선인 학생들을 교육시키되 일본에 대한 충성심을 주입시키는 데 집중했지만, 실제로 학생들은 민족적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저항적인 학습과 교류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광주역 사건 이후, 이들은 곧바로 독립적 조직을 통해 11월 3일 시위를 기획했고, 광주 시내 각 학교에서 동시에 거리로 나와 만세를 외쳤습니다. 특히 중심이 되었던 학교는 광주고보와 수피아여학교였습니다. 이들은 선언문을 사전에 인쇄해 배포하고, 시위 동선을 사전에 점검했으며, 체포될 경우를 대비한 대응 전략까지 세워 두었습니다.
단지 즉흥적 분노에 의한 행동이 아니라, 치밀하게 계획된 항일운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배경에는 당시 광주 지역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던 기독교 기반 공동체, 민족 교육기관, 언론인들의 간접적 지원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광주학생항일운동은 특정 사건에 대한 반응을 넘어, 이미 준비된 토양에서 성장한 조직적 저항이었습니다.
광주공립고보와 수피아여학교, 그 운동의 실질적 진원지
많은 역사 기록에서 “광주역”이 시작점으로 소개되지만, 실제 광주 학생항일운동의 진짜 중심은 바로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와 수피아여학교였습니다. 이 두 학교는 단지 교육기관의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학생 주도의 항일운동이 싹틀 수 있었던 양성소였습니다.
광주고보는 일제의 강압적인 교육 정책에도 불구하고, 민족의식을 갖춘 교사들과 자주적인 학생 모임들이 활발했습니다. 학생들은 신문기사를 몰래 회람하며 현실을 인식했고, ‘국채보상운동’과 ‘3·1운동’의 선배들에 대한 자료를 읽으며 저항의식을 키웠습니다.
한편 수피아여학교는 미국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기독교 여학교로, 여성의 권리와 민족의식을 동시에 교육했던 곳입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여학생들이 사회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눌 수 있었고, 선교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서구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사상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이 두 학교의 학생들은 광주역 사건이 일어난 직후부터 독립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시위 전날에는 학교 담벼락에 ‘만세’ 글자를 붙이거나 선언문을 몰래 인쇄해 시내로 퍼뜨리는 일을 감행했습니다.
이 두 학교는 운동이 끝난 후에도 단지 역사적 배경으로 남지 않았습니다. 이후 후속 세대에게 항일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교육을 통해 자각을 이어나가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광주의 학생운동이 일회성이 아닌 ‘연속된 정신’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곳에 있습니다.
광주에서 전국으로 퍼진 민중의 함성, 그리고 오늘의 의미
1929년 11월 3일 시작된 광주 학생항일운동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전남, 전북, 충청, 서울, 심지어 만주까지 퍼졌고, 그 규모는 약 5만여 명에 달했습니다. 이 운동은 단지 학생 시위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후 교사, 종교인, 상인, 농민 등 민중이 동참하면서 전 민족적 항일투쟁으로 발전했습니다.
광주의 항일운동은 다른 지역의 시위와는 달리 철저히 기획되고 자율적으로 조직되었다는 점에서 특이하며, 일제 당국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결국 일본은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 내 중등학교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했고, 학생 조직을 불법화했으며, 민족 교육을 억압하는 정책을 본격적으로 시행했습니다.
하지만 광주 학생항일운동은 그 자체로 성공적인 독립운동이었습니다. 비록 독립을 즉각적으로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이 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해외 언론에도 알려지며, 조선 민중의 항일 의지를 재확인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날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에는 학생운동기념탑이 세워져 있고, 교육과 전시 활동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매년 11월 3일에는 학생독립운동기념일 행사가 열리며, 각급 학교에서 ‘학생 항일정신’을 기리는 행사가 진행됩니다.
이러한 기억은 단지 의례적인 행사가 아니라, 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사회를 바꾸려 했던 용기와 의지를 되새기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의 학생들이 광주의 그날을 기억하고, 오늘날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해 질문하고 고민할 수 있다면, 그 정신은 여전히 살아 있는 것입니다.
광주 학생항일운동의 진짜 중심은 단지 공간이나 사건이 아니라, ‘자각한 청년들의 연대’와 ‘지역사회 전체의 숨은 저항’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 함성을 오늘의 현실에서도 다시 들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