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백산상회, 무역을 가장한 항일거점 – 부산에서 피어난 안희제의 독립혼
1914년 부산 동광동 한복판에 문을 연 ‘백산상회(白山商會)’는 겉보기엔 곡물과 해산물을 거래하는 평범한 민간 상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조용히, 그러나 뜨겁게 조국의 독립을 도모하던 이들의 은밀한 전진기지였습니다. 백산상회를 설립한 이는 경상남도 의령 출신의 민족 자본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안희제(安熙濟)였습니다. 그는 단순한 사업가가 아니었습니다. 국권 회복의 염원을 가슴에 품고, 상업이라는 외피를 입힌 ‘독립운동 네트워크’를 현실화한 전략가였습니다.
이 상회는 상하이임시정부와 연결된 독립운동 자금 송출 창구이자,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의 연락 기지로 기능했습니다. 겉으론 무역과 유통을 위한 상업 활동을 펼쳤지만, 실제로는 고향 땅에서 팔아 마련한 자본과 지지 세력을 동원해 독립운동의 생명줄을 이어갔습니다. 이는 부산이라는 항구도시의 이점을 십분 활용한 민족 저항의 한 방식이자, 일제의 감시망을 교묘히 피해 간 지혜였습니다.
백산상회의 등장은 단순한 한 상인의 성공담이 아닌, 근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경제와 애국이 만나는 지점을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외형은 자본, 내면은 저항이었던 이 상회는, 안희제를 비롯한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어떤 방식으로 민족 해방을 도모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상징물로 남아 있습니다.
안희제의 삶 – 교육·조직·경제로 꿰어낸 독립운동
안희제는 1885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는 1907년 부산 구포에 구명학교를, 고향 의령에는 의신학교와 창남학교를 세우며 민족교육의 초석을 다졌습니다. 이는 단순히 문해력 향상이 아니라, 민족의식 고취와 독립정신 함양을 목적으로 한 교육운동이었습니다. 그는 1909년 서상일 등과 함께 비밀결사 ‘대동청년당’을 결성하여,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은밀하게 조직을 유지했습니다.
1914년 백산상회를 설립한 후 안희제는 상업을 민족운동의 도구로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대하며 본격적인 무역망과 정보망을 구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고향의 전답 2,000두락을 매각하여 초기 자금을 확보하였고, 조선국권회복단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독립자금을 상하이임시정부에 전달했습니다.
1927년에는 협동조합운동에도 참여하며 ‘자력사’를 조직했고, 같은 해 기미육영회를 통해 다수의 청년을 해외 유학 보내 독립운동의 인재로 양성하였습니다. 이들 중에는 문시환, 신성모, 안호상, 이극로, 전진한 등 쟁쟁한 인물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안희제는 단지 자금 후원자에 머물지 않고, 사람을 키우고 조직을 움직이며, 지속 가능한 독립운동의 생태계를 설계한 민족운동 기획자였습니다.
만주에서 펼친 또 하나의 이상 – 발해농장과 발해학교
1931년 이후 안희제는 또 한 번의 전환을 시도합니다. 대종교에 입교한 그는 민족 시조 단군을 숭앙하는 정신을 바탕으로 만주로 이주해 발해농장과 발해학교를 세웁니다. 이는 단순한 이주 농장 설립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수탈로 삶의 터전을 잃은 조선 농민들이 만주로 몰려들었지만, 이들은 다시 중국 지주들의 착취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안희제는 동경성 인근 땅을 매입하여 300여 호의 한인 농민을 정착시키고, 5년 할부로 토지를 분배하는 방식으로 자작농화를 시도했습니다.
이 농장은 단지 경제적 자립의 실험장이 아니라, 민족교육의 실천지였습니다. 그는 농장 근처에 발해학교를 세워 청소년들에게 민족사를 가르치고, 독립사상을 심어주었습니다. 이는 기존 독립운동의 도시 중심성에서 벗어나, 민중이 있는 곳으로 확장된 실천이었습니다. 단군을 민족의 뿌리로 삼고, 흩어진 조선인을 재결속하려는 그의 비전은 당시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험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42년, 일제는 대종교가 독립운동 조직이라고 간주하고 대대적인 탄압을 개시합니다. 안희제를 포함한 21명의 대종교 인사가 검거되었고, 이 중 10명이 고문 끝에 순국하였습니다. 안희제 역시 1943년 옥중에서 생을 마감하며, ‘임오십현(壬午十賢)’ 중 한 명으로 불리게 됩니다. 그가 남긴 유산은 땅과 건물만이 아니었습니다. 한 민족의 정신과 비전을 구체적으로 그려낸 사람, 바로 그것이 안희제였습니다.
백산상회의 흔적과 그 이후 – 역사적 기억의 복원 과제
안희제가 설립한 백산상회는 1920년대 후반에 접어들며 내홍에 휩싸입니다. 경영난과 자금 횡령 문제로 주주 간 법적 분쟁이 발생하였고, 결국 1928년 1월 29일 자진 해산이라는 불명예를 맞게 됩니다. 이후 건물은 부동산회사에 매각되었고, 수차례 소유권 이전을 거치며 결국 오늘날엔 원룸 건물이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백산상회의 실물은 사라졌지만, 이름만은 부산 중구 동광동의 도로명 ‘백산길’로 남아 근대사의 한 단면을 전하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옛 상회 터에서 가까운 백산길 11번지에 ‘백산기념관’이 건립되었습니다.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지어진 이 기념관은 안희제의 생애와 업적, 백산상회의 항일운동 활동상을 전시하고 있으며, 시민들에게 독립운동의 숨은 공간이 있었음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부산 용두산공원 팔각정 인근에는 1989년 안희제 동상이 세워졌고, 1994년에는 흉상으로 교체되어 지금도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쉬움도 남습니다. 백산상회가 단순한 상점이 아닌 독립운동의 핵심 거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대한 보호나 복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역사적 건물의 가치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정책적 보호 장치가 부족했던 결과입니다. 백산상회의 역사적 복원과 더불어, 안희제의 활동을 재조명하는 것은 부산이라는 도시의 항일정신을 계승하는 실질적인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