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역사와 인물

진남관에서 피어난 저항의 불꽃 – 여수공립보통학교 학생운동의 발자취

나나77. 2025. 7. 3. 00:03

전라남도 여수는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의 전승 신화가 깃든 군사 요충지이자, 동시에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의 숨은 중심지였습니다. 특히 여수공립보통학교는 충무공 이순신이 머물렀던 유서 깊은 건축물 ‘진남관(鎭南館)’을 교사로 사용하며, 그 공간에서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근대 교육과 항일 운동이 함께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상징성을 가집니다. 이 학교는 1908년 사립 경명학교로 출발해 1911년 공립보통학교로 전환되었고, 1935년까지 진남관을 교사로 활용하였습니다.

사진엽서, 여수 부사종고산과 공립보통학교(출처: 수원광교박물관)
사진엽서, 여수 부사종고산과 공립보통학교(출처: 수원광교박물관)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여수공립보통학교는 일제의 식민교육에 맞선 학생들의 자주적 저항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특히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까지 이 학교에서는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의 민족차별적 행위에 항의하는 동맹휴교, 항일 격문 배포, 격렬한 항의 운동이 연이어 전개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곳은 단순한 학습 공간이 아니라, 독립정신을 실천하는 실질적 저항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광주학생운동(1929)의 여파로 전국적으로 항일 학생운동이 확산되었을 때, 여수 역시 그 흐름에서 결코 뒤처지지 않았습니다. 여수 출신 청년 여도현의 활동과, 김용환을 중심으로 한 여수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항일 격문 배포 사건은 여수 지역 항일운동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형성하였습니다. 이처럼 지역과 공간, 인물의 삼박자가 맞물려 이뤄낸 여수 학생운동은 단순한 사건을 넘어선 역사적 흐름의 일부였습니다.

민족 차별에 맞선 최초의 움직임, 1920년대 여수의 동맹휴교 사건

여수공립보통학교에서 일제의 민족차별 정책은 학생들에게 직접적인 폭력과 차별로 나타났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28년 3월, 일본인 교장 츠츠이(筒井精記)가 4학년 학생 강선봉(姜先峯)을 장난을 이유로 폭행한 사건입니다. 이에 격분한 4학년 전체 학생들은 교장에게 배울 수 없다며 집단 등교 거부에 들어갔고, 자발적인 동맹휴교를 선언했습니다. 이는 여수 지역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집단행동이었으며, 민족 차별에 대한 학생들의 초기 저항 의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였습니다.

그보다 앞선 1924년에도 일본인 교장 코아시(小芦一之助)가 뚜렷한 이유 없이 5학년 학생 정효조(鄭孝朝)를 퇴학시키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정효조의 숙부와 지역 유력 인사들이 학교 측과 교육 당국에 항의하며 진정서를 제출하고, 학무위원회까지 소집하였으나 교장은 모든 혐의를 부인하며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이 사건은 지역 사회 전체가 식민 권력의 불합리한 교육 운영에 저항한 상징적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동맹휴교와 진정 활동은 단순히 일회성 반발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학교 구성원과 지역 사회가 하나되어 민족 차별을 제도적으로 문제 삼고자 했다는 점에서, 이후 본격화되는 1930년대 항일 학생운동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일본인 교장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당시, 어린 학생들의 집단행동은 단지 감정적인 대응이 아니라 민족 정체성을 지키려는 의식적 행동이었습니다.

 

광주학생운동의 불씨가 여수로 번지다 – 김용환과 여도현의 항거

1929년 11월, 광주에서 발생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전국적인 항일 학생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여수 역시 그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광주고등보통학교에서 활동하던 여수 출신 학생 여도현(呂道玄)은 비밀결사 ‘성진회(醒進會)’의 일원으로 활동하다 퇴학을 당했고, 고향 여수로 돌아온 후 여수공립보통학교 학생들과 접촉하여 학생운동을 조직하려다 체포되었습니다.

특히 주목할 인물은 여수공립보통학교 학생 김용환(金龍煥)입니다. 그는 1930년 1월, 고향 학교에서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동조 시위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겼고, 스스로 항일 격문을 80장이나 작성해 학교 교실과 교내에 배포했습니다. 이 격문에는 식민지 교육에 대한 반대, 독립 의지의 표명, 학생 각자의 자각을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결국 김용환은 3월 13일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 혐의로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는 단지 격문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자유를 빼앗긴 것이며, 이는 일제가 표현의 자유마저 탄압했던 당시 시대 상황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 사건은 여수공립보통학교가 단지 교육의 장이 아닌 실천적 민족운동의 무대였음을 증명하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진남관, 교육과 항일운동이 맞닿은 공간의 역사적 의미

여수공립보통학교가 자리 잡았던 진남관(鎭南館)은 단지 건축유산을 넘어선 역사문화적 상징 공간입니다. 본래 조선시대 전라좌수영의 객사였던 이곳은,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직전 일본의 침공에 대비하던 장소로서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이순신 이후 이 자리는 삼도수군통제사의 통제영이 되었고, 전통 군사 거점의 중심이었습니다.

근대기에 들어서 이 건물은 1911년 여수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면서 교사로 사용되었습니다. 충무공의 전략과 의지가 스며 있는 공간에서 여수의 아이들은 글을 배우고 민족의식을 키워나갔습니다. 이후 진남관은 1930년대 학생들의 항일운동이 실천된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고, 이로써 이곳은 전쟁과 저항, 교육과 실천이 어우러진 다층적 기억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현재 진남관은 국보 제30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여수서초등학교의 전신인 여수공립보통학교의 시위지로서도 역사적 의미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오늘날 진남관은 단지 관광 명소가 아니라, 조선의 명장 정신과 20세기 항일정신이 공존하는 교육의 현장입니다. 이곳에서 벌어진 항일 학생운동은 지역적 저항이자 전국적 독립운동사의 일부로서, 대한민국의 자유와 자주를 향한 뿌리 깊은 의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