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에 울려 퍼진 6일간의 함성 – 강원도 최대 규모 3·1운동의 기록
1919년 전국을 뒤흔든 3·1운동은 강원도에서도 크고 작은 형태로 확산되었지만, 그중에서도 양양군에서 벌어진 3·1운동은 규모와 열기 면에서 타 지역과 비교해 손색이 없을 정도로 치열하고도 조직적인 항쟁이었습니다. 양양에서의 만세시위는 단순한 일회성 시위에 그치지 않고, 6일 동안 8회에 걸쳐 전개된 대규모 민중 저항 운동이었습니다. 연인원 1만 5천여 명이 참가한 이 운동은 양양 전역 6개 면, 82개 마을에 걸쳐 확산되었으며, 지역 주민의 강력한 항일 의지와 민족 독립에 대한 열망이 어떠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1919년 4월 3일부터 시작된 이 시위는 4월 9일까지 매일같이 이어졌으며, 특히 마지막 날 벌어진 현북면 기사문리 ‘관 고개’ 시위는 6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일제의 무차별 발포로 9명이 사망하고 20여 명이 중상을 입는 비극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해당 지역은 ‘만세고개’로 불리게 되었으며, 지금도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그날의 기억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양양 3·1운동의 전개 과정은 단순히 자발적인 민중의 봉기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림과 기독교, 그리고 지역 청년층이 조직적으로 시위를 준비하고 전개했으며, 독립선언서의 유통과 태극기 제작 등 철저한 준비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항쟁이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러한 준비과정부터 실제 시위의 전개, 마지막 참극의 기억까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유림과 기독교의 조직적 결합, 시위의 준비과정
양양 3·1운동은 두 개의 세력이 각각 독립적으로 시위를 준비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는 유림 중심의 조직이었고, 다른 하나는 양양감리교회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계열이었습니다. 유림 측에서는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분개한 전주이씨 출신 유생들과 양반들이 중심이 되었고, 도천면 중도문리에 거주하며 쌍천서숙을 운영하던 이석범이 주축 인물로 나섰습니다. 그는 고종 국장에 다녀오는 길에 버선 속에 숨긴 독립선언서를 가져와 시위 조직에 활용했습니다.
기독교 측에서는 양양감리교회의 전도사 조영순과 그의 딸 조화벽이 중심인물이었습니다. 조화벽은 개성의 호수돈여학교 재학 중 만세운동에 참여한 뒤 독립선언서를 양양으로 가져오던 중 대포항에서 일본 경찰에 의해 검문을 당했지만, 버선 속에 숨긴 선언서는 발각되지 않고 무사히 전달되었습니다. 이 독립선언서는 양양보통학교 출신의 김필선에게 전달되어, 그는 양양면사무소에서 등사판을 활용해 200여 장의 독립 문서와 태극기를 인쇄하고 배포했습니다.
이 두 조직은 시위를 앞두고 통합되었고, 각 면의 주민과 청년들을 대상으로 조직적 결집을 시도했습니다. 시위는 단순히 기습적 폭발이 아닌, 독립선언서 인쇄, 태극기 제작, 시위 날짜와 장소에 대한 논의, 인물 간 연계 등의 과정을 거친 치밀한 항일운동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은 이후 양양에서 나타난 대규모 시위와 그 전개 방식이 단순한 민중 봉기가 아니라, 조직적 독립운동의 일환임을 증명합니다.
6일간 이어진 양양군 3·1운동의 격렬한 전개
양양에서의 본격적인 시위는 1919년 4월 4일 양양읍 장날을 기점으로 폭발했습니다. 시위는 전날 경찰에 의해 주도 인물 22명이 체포되면서 일시적으로 중단될 뻔했지만, 최인식 등은 피신하여 재집결을 유도했고, 시장 내 200여 명의 군중이 만세 시위를 벌이며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시위는 밤 9시경 다시 이어져, 총 1,100여 명이 양양경찰서를 포위하며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격렬한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이때 일본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3명이 사망하고 다수가 상처를 입었니다.
시위는 이후 각 면으로 확산되었습니다. 4월 5일에는 강현면과 도천면에서 기독교도 중심의 시위가 이어졌고, 손양면에서도 주민들이 시장에 모여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4월 6일에는 1,200~1,300여 명의 인원이 양양 읍내로 진입해 시위를 벌였고, 검거자 석방을 요구했습니다. 4월 7일에는 서면 시위대가 면사무소를 공격하고, 현북면의 박규병 등은 300여 명을 이끌고 양양 읍내로 진입해 다른 시위대와 합세하여 거대한 규모의 시위를 전개했습니다.
가장 참혹했던 시위는 4월 9일 현북면 기사문리 관 고개에서 벌어진 만세시위였습니다. 이날은 시위의 마지막 날이자,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낳은 날로 기록되었습니다. 현북면사무소 앞에서 출발한 600여 명의 시위대는 기사문리 경찰주재소로 향했고, 일본 경찰과 군인들은 이들을 향해 무차별 발포했습니다. 그 결과 9명이 현장에서 목숨을 잃고, 20여 명이 중상을 입는 참극이 벌어졌습니다. 이 시위를 기념하기 위해 ‘관 고개’는 훗날 ‘만세고개’로 명명되었습니다.
기억과 기념의 공간 – 만세고개와 유적비의 의미
양양 3·1운동은 총 8회의 시위와 두 건의 사전 진압 시도를 포함하여, 강원도 내 가장 격렬하고 조직적인 항일 시위 사례로 남게 되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날 관 고개에서 벌어진 총격 사건은 전국적인 3·1운동 중에서도 희생자 수가 많은 축에 속하며, 강원도 지역 민중의 강력한 저항 의지를 잘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입니다.
이후 일본 제국은 시위 진압을 위해 강릉수비대 병력을 추가로 투입하고 5월 14일까지 총 374명을 검거하였으며, 211명이 자수했습니다.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양양 주민들의 항거는 끝까지 멈추지 않았고, 양양 3·1운동은 그 상징성과 규모 면에서 전국적인 항일의 대표 사례로 평가받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가치를 기리기 위해 2000년 3월 1일, 양양 3·1만세운동 유적비 건립추진위원회는 기사문리 만세고개에 기념공원을 조성하였습니다. 공원 내에는 유적비, 표석, 동상 등 다양한 기념물이 설치되어 있으며, 지금도 매년 3월 1일이면 지역민들이 모여 순국선열의 정신을 기리고 있습니다. 이 기념공원은 단지 한 차례 시위를 기리는 장소가 아니라, 양양군민의 민족정신과 항일의지를 후세에 전하는 역사 교육의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양양의 3·1운동은 단지 지방에서 벌어진 작은 사건이 아닙니다. 이는 전국적인 독립운동 물결 속에서 지역민들이 얼마나 주도적으로, 그리고 치열하게 저항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 함성과 피의 대가를 기억하며, 민주주의와 독립의 가치를 더욱 깊이 새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