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진 저항과 비극 – 대전형무소가 남긴 기록
1919년 3·1운동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정면으로 거부한 전 민족적 저항이었습니다.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며 일제의 사법 체계를 마비시킬 정도로 수형자가 급증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감옥의 확장과 신설을 추진하게 되었고, 이러한 배경 속에서 대전형무소가 세워졌습니다. 1919년 10월 19일, ‘대전감옥’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이 행형시설은 이후 점차 규모를 확대해 가며 대전형무소로 승격되었습니다.
대전이 감옥 설치지로 선택된 데에는 여러 가지 지리적, 행정적 요인이 작용했습니다. 대전은 경부선과 호남선 철도의 교차점으로 수감자 이송이 용이했고, 서울과도 가까운 지리적 이점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더불어 당시 대전은 빠르게 성장하는 신흥 도시였기에 대규모 부지를 확보하는 것도 수월했습니다. 일제는 이러한 조건을 종합해 대전형무소를 식민지 통치의 중심 감옥 중 하나로 삼고자 했습니다.
형무소가 들어선 부지는 건물이 밀집되지 않았고, 도주 우려를 최소화할 수 있는 개활지였습니다. 이러한 전략적 배치는 단지 수감자 관리를 넘어서, 항일 세력과 독립운동가들을 효과적으로 억압하려는 일제의 철저한 계획이었습니다. 대전형무소의 설치는 단순한 행정조치가 아니라, 일제 식민통치의 물리적 기반 확대를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전국 두 번째 규모의 감옥으로 성장
대전형무소는 개소 직후부터 급격한 확장을 거듭했습니다. 1919년 말 250명 수준이던 수감 인원은 1938년 말 기준 1,250명으로 무려 다섯 배나 증가하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범죄자 증가가 아니라, 일제의 폭압 통치에 항거한 독립운동가와 정치범의 급증을 의미합니다. 그만큼 이 감옥은 일제에 의해 항일세력을 집중적으로 수용하는 ‘억압의 중심지’로 기능했습니다.
1938년 기준, 조선 내 전체 감옥 수감자 수는 19,328명이었고, 이 중 약 6.5%를 대전형무소가 수용했습니다. 이는 전국 28개 감옥 중 서대문형무소에 이어 두 번째로 규모였습니다. 일제는 이를 기반으로 대전형무소를 전국 단위의 핵심 행형시설로 격상시키고, 1924년까지 3만 4,000평의 대지와 1만 4,000평의 건축 면적을 확보하는 대규모 시설로 확장했습니다.
이곳에는 안창호, 여운형, 김창숙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습니다. 그들은 일제의 철창 안에서 투옥되었지만, 그 신념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대전형무소는 단순한 구금 시설이 아니라, 조선의 독립을 향한 신념이 억눌리고도 끝내 굴복하지 않았던 공간이었습니다. 감옥의 벽은 사람의 몸은 가둘 수 있었지만, 조국에 대한 의지까지는 가두지 못했습니다.
해방 후에도 계속된 비극 – 한국전쟁과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1945년 광복은 대전형무소에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올 수 있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분단과 전쟁이라는 또 다른 비극이 이 공간을 더욱 참혹한 학살의 현장으로 만들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대전형무소에서는 국군과 인민군 양측에 의해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습니다.
먼저 국군과 경찰은 6월 말부터 7월 중순까지 부산으로 후퇴하면서 수많은 수감자와 양민을 대전 동구 산내 골령골로 이송해 학살하였습니다. 이들은 아무런 재판 없이 총살당하고 암매장되었으며, 그 수는 약 6,000여 명에 달합니다. 이 사건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친위대의 집단학살과도 비견되는 비극이었습니다.
이어 1950년 9월, 인민군이 대전을 점령한 시기에는 또 다른 대규모 학살이 발생했습니다. 인민군은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우익 인사들과 미군 포로, 경찰 등을 끌어내 용두동, 중촌동 등지에서 총살했습니다. 희생자는 1,500여 명으로 추정됩니다. 이렇게 대전형무소는 해방 이후에도 끊임없이 죽음을 품는 공간이 되었고, 이념의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의 상징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대전형무소는 1960~80년대까지 독재 정권 아래에서 정치범과 양심수를 수용하는 시설로 악명을 이어갔습니다. 이응로 화백, 신영복 교수, 조영래 변호사 등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이곳에 수감되었으며, 감옥의 이름은 시대가 바뀔수록 바뀌었지만, 억압과 고통의 실체는 여전했습니다.
기억을 위한 공간으로 – 오늘의 대전형무소
대전형무소는 1984년 유성구 대정동으로 이전되었으며, 이전 전까지는 중촌동에 있었습니다. 현재 중촌동의 옛터에는 과거의 흔적 대부분이 사라졌고, 반공애국지사영령추모탑과 자유회관, 아파트 단지 등이 세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감옥의 일부였던 망루 한 동과 우물 하나만은 철거되지 않고 문화재로 등록되어 보존되고 있습니다.
이 망루는 1971년 설치된 것으로, 대전시 문화재자료 제47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단순한 구조물이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독립운동가, 양심수, 민간인의 고통과 한이 서려 있습니다. 이 공간은 단지 옛 감옥의 유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 현대사의 비극과 저항을 집약한 상징적 장소입니다.
대전형무소의 기억은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역사입니다. 일제강점기의 억압, 한국전쟁기의 학살, 독재정권의 탄압까지, 이 공간은 단 한 시대도 조용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꺾이지 않은 저항의 의지, 인간 존엄을 향한 갈망은 오늘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다.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이 공간이, 어떻게 역사의 교훈을 말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교훈을,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전할 수 있을지 묻고 싶습니다. 대전형무소는 단지 과거의 감옥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기억의 장소’로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