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행을 뒤흔든 조용한 폭풍, 대구의 의열 투사 장진홍의 결의
1927년 가을의 대구는 겉으로는 평온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체제 아래 조선은행 대구지점이 폭파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테러 행위가 아니라, 조국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건 한 독립운동가의 처절한 선택이었습니다. 이 사건의 주인공은 경북 칠곡 출신의 장진홍입니다.
장진홍은 정식 군인이었고, 서당과 학교에서 유교 철학을 공부한 유생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교육과 이념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고향 인동의 인명학교에서 항일 사상을 접한 그는, 이후 교사 장지필과 동지 이내성을 만나면서 독립운동가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그의 삶은 조용히 흐르지 않았습니다. 청년 시절 만주로 넘어가 러시아 내전과 중국 독립운동 기지 활동에도 참여했고, 이후 국내로 돌아와 일제의 만행을 직접 조사하고 알리는 일을 자처했습니다.
그의 항일 의지는 결코 즉흥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장진홍은 1926년부터 이미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의거를 계획하며, 1년 이상을 준비했습니다. 그는 다이너마이트를 구해 직접 폭탄을 제작했고, 그것을 벌꿀 상자에 숨겨 배송하는 방식으로 거사를 실행했습니다. 이 의거는 단일 인물이 일으킨 사건이지만, 그 안에는 철저한 계획과 정신, 그리고 시대적 절박함이 담겨 있었습니다.
장진홍의 삶과 독립운동의 여정
장진홍은 경상북도 구미시 인동면에서 태어났습니다. 유교적 학문이 살아 있는 지역에서 성장한 그는 인명학교에서 항일 교육을 받았고, 선생 장지필의 영향을 깊게 받았습니다. 장지필은 단순한 교육자가 아니라 한주학파의 계승자로서, 제자들에게 민족주의적 철학과 실천을 강조한 인물이었습니다. 장진홍은 이처럼 전통적인 학문과 독립운동이 결합된 환경에서 민족의식을 키워나갔습니다.
군 복무를 마친 그는 만주로 건너가 김정묵, 이국필 등과 만나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논의하고,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군대 양성을 위한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소련 내 내전의 격화로 국내로 귀환한 그는 곧바로 일제의 만행을 전국적으로 조사하며, 이를 기록해 해외로 전달하는 정보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는 자신이 모은 자료를 통해 3·1운동의 실상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전답을 팔아 기금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활동은 ‘폭력’보다는 ‘정보’와 ‘의지’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장진홍은 보다 직접적인 실천이 필요하다는 결심에 이르게 됩니다. 그것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조국의 현실을 누구보다 냉정하게 이해한 결과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을 폭파하는 계획을 세우고 행동에 나섰습니다. 그는 자금을 들여 폭탄을 제작했고, 일본인 폭약 전문가에게 제조법을 배우는 등 철저한 준비를 거쳤습니다.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의거 – 실행과 파장
1927년 10월 18일, 장진홍은 벌꿀상자로 위장한 폭탄 네 개를 제작하고, 이를 덕흥여관 종업원 박노선을 통해 배달했습니다. 폭탄은 각각 조선은행 대구지점, 스도모토 경북지사, 이시모토 경찰부장, 그리고 식산은행 대구지점으로 보내졌습니다. 그중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전달된 폭탄은 실제로 작동했습니다. 은행 직원이 상자를 열던 도중 폭발이 일어나, 은행원 다섯 명과 일본 경찰 한 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유리창 70여 장이 깨질 만큼 강력한 폭발이었습니다.
이 의거는 조용한 대구 시내 한복판을 강타한 폭풍과도 같았습니다. 일제 경찰은 즉각 수사를 시작했고, 장진홍은 한동안 선산, 안동, 영천 등을 돌아다니며 몸을 피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1929년 2월, 일본 오사카에서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오랜 고문과 옥살이 끝에 1930년 7월 31일 옥중 자결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장진홍의 의거는 단순히 폭탄을 던진 사건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 이면에는 유교적 가치관과 민족 정신, 그리고 조직적 항일투쟁이 결합된 복합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는 단독 행동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김창숙, 김정묵, 장지필 등과 함께 유림계와 의열단계열을 연결하는 중간 고리였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당시 의열투쟁사에서 지역과 이념, 세대를 아우른 민족 전선의 실천적 사례로 평가됩니다.
기억과 계승 – 잊힌 장소, 살아 있는 정신
오늘날 조선은행 대구지점이 있던 자리는 대구 중구 중앙대로 425, 현재는 하나은행 대구기업금융센터가 들어서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장진홍의 의거를 알리는 표지석 하나조차 없습니다. 시민들은 매일 그 앞을 지나지만, 1927년 이 자리가 민족을 위한 결단의 공간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역사 현장이 도시개발과 무관심 속에 사라져 가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나마 그의 정신은 고향에서 기억되고 있습니다.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애국동산에는 ‘순국의사 장진홍 선생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구미시 진평동 동락공원에는 2015년 복원된 동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동상은 그의 결의를 기억하려는 후손과 지역사회의 노력이 담긴 결과물입니다.
장진홍의 조선은행 폭파 의거는 단순한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 청년의 철저한 준비와 민족에 대한 사랑, 그리고 죽음으로까지 이어진 책임감의 산물이었습니다. 그는 일제 강점기의 어두운 시대 속에서, 단호하게 결단하고 조용히 거사를 실행한 인물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독립은, 이처럼 이름조차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들의 피와 헌신 위에 세워졌습니다.
장진홍의 삶은 “소리 없는 함성”으로, 오늘날에도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과연 그들이 지키려 했던 나라와 정신을 어떻게 계승하고 있는가. 대구 한복판의 그 자리에서, 우리는 조용히 되새겨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