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 민족의 뜻을 세우다 – 신간회 본부가 남긴 항일의 흔적
서울 종로는 조선 시대부터 정치와 문화, 상업의 중심지로 기능해 왔습니다. 일제강점기에도 종로는 조선인들의 생활 중심지였으며, 수많은 사회운동과 항일 활동이 이곳에서 시작되거나 끝을 맺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1927년 창립되어 전국을 움직인 항일 조직, 신간회(新幹會)의 본부가 종로에 있었다는 사실은 특히 주목할 만합니다.
신간회는 단순한 항일 단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그리고 종교인과 언론인까지 아우른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민족협동전선 조직이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서울 종로 2가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자리에 버스 정류장이 들어섰고, 근처에는 표석만이 당시의 흔적을 말없이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1920년대 말, 그곳은 독립을 꿈꾸는 수만 명의 국민들이 마음을 모은 공간이었습니다.
신간회의 창립은 단순히 새로운 조직의 탄생이 아니라, 1920년대 일제의 문화통치와 민족 분열 책동에 맞선 민족 내부의 자각과 연대의 산물이었습니다. 3·1운동 이후 각자의 방식으로 독립을 꿈꾸던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더 이상 따로 갈 수 없다는 절박한 인식 속에서 손을 맞잡은 것입니다.
이 글에서는 신간회가 창립되기까지의 국내외 배경, 종로 본부를 중심으로 한 활동, 지회 확산과 해소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따라가며, 신간회의 민족사적 의미와 종로가 지닌 공간적 상징성까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민족 유일당을 향한 길 – 신간회의 태동과 결성
신간회의 창립은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 배경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분열, 자치운동 세력의 확산, 국제 공산주의의 민족통일전선 전략 등 복잡한 시대적 흐름이 존재했습니다. 3·1운동 이후 임시정부는 외교 독립운동에 집중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내부 분열로 동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국내외 민족운동 진영은 보다 실질적인 지도 조직이 필요하다는 데 뜻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1926년, 중국의 국공합작이 북벌을 성공적으로 이끈 사례는 조선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국내에서도 좌우 합작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결국 1926년 11월 사회주의 단체들이 정우회로 통합되며 ‘정우회 선언’을 발표하면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간 제휴의 길이 열렸습니다.
비타협적 민족주의 진영도 이 흐름에 호응했습니다. 언론에서는 “정치적 억압 앞에서 유산계급이든 무산계급이든 이해관계는 같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고, 사회주의자들 역시 "적의 심장을 향한 민족혁명 유일전선이 필요하다"고 호소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공감대 속에서 1927년 2월 15일, 경성 YMCA 회관에서 신간회가 정식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창립 당시 채택된 강령은 “① 민족의 각성 촉진 ② 민족의 단결 공고화 ③ 기회주의 배격”의 세 가지였습니다. 특히 두 번째 항목은 당시 일제의 분열책에 맞서 민족 내부의 연대와 단결을 최우선으로 삼았음을 보여줍니다. 신간회의 창립은 단순한 조직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운동이자 민족운동의 전환점이었습니다.
종로에서 전국으로 – 신간회의 본부와 확산
신간회의 중심지였던 서울 종로 2가는 그 자체로 상징적인 장소였습니다. 지금의 중소기업은행 종로지점 인근, 당시 본부가 있던 자리에는 오늘날 그 흔적을 알리는 표석이 서 있습니다. 비록 건물은 사라졌지만, 이 공간은 일제의 심장부 한가운데에서 독립을 외친 정신의 본산이었습니다.
신간회는 창립 직후 빠르게 전국으로 조직을 확산시켰습니다. 1927년 당시 조선 내 군(郡)이 약 220개였는데, 그중 143개 지역에 지회를 세웠고, 회원 수는 4만 명에 육박했습니다. 지회 확산은 신간회의 조직 전략에 기반했습니다. 단체 가입이 아닌 개별 가입제를 택함으로써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열린 조직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같은 해 5월에는 여성운동 통일전선체인 근우회가 자매단체로 발족하며, 성별과 세대를 초월한 민족운동의 연대가 강화되었습니다. 본부는 명망가 중심의 민족주의자들이 주도했고, 지방 지회는 청년 중심의 사회주의자들이 활동을 주도했습니다. 이와 같은 중앙과 지방의 이념적 균형은 당시 보기 어려운 독특한 조합이었습니다.
종로 본부는 활동의 중심지로서 각종 강연회, 연설회, 간담회를 열었고,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한 언론 네트워크와 연계되어 여론을 형성하고, 민심을 움직이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천도교 구파, 조선민흥회, 개신교계와 불교계 일부 인사까지 아우르며 신간회는 사실상 조선 민족운동의 최고 연대체가 되었던 것입니다.
해소 이후에도 남은 정신 – 신간회의 역사적 의미
하지만 신간회가 그토록 순탄하게만 이어졌던 것은 아닙니다. 성장의 그림자에는 내부 분열과 외부 탄압이 함께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특히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계기로 지도부에 대한 일제의 본격 탄압이 시작되었고, 사회주의 계열 주요 인사들이 검거되면서 중앙은 점점 우경화되었습니다. 이후 김병로가 지도부에 등장하면서 자치론자와 손잡고 신간회를 민족개량주의에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지방의 사회주의 계열과 마찰을 빚었고, 결국 내부 균열로 이어졌습니다. 신간회는 더 이상 통일전선의 이상을 유지할 수 없었고, 1931년 5월, 4년 4개월의 활동을 끝으로 해소되었습니다. 여기서 ‘해체’가 아닌 ‘해소’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단체는 사라졌지만 그 정신은 다른 형태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신간회의 유산은 이후 사회주의자들의 비밀결사 활동, 민족주의 계열의 계몽운동,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의 모델로도 이어졌고, 많은 청년들은 만주로 건너가 무장투쟁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신간회는 “우리 역사상 최초로 민족 내부가 좌우를 넘어 연대한 경험”이라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그 중심지가 종로 한복판에 있었다는 사실은, 독립운동이 변방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일제의 심장부 한가운데에서도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오늘날 종로를 지나는 수많은 시민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그 자리에, 일제의 감시를 뚫고 민족의 미래를 논하던 사람들의 발걸음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고, 우리 사회의 연대와 협력을 위한 가장 강력한 전례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지금도 종로의 거리 한복판에 남아 있습니다.